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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의 탄생 , 붉은 훈장(The Red Badge of Courage, 1951)

 
  그는 글을 쓰는 잡다한 일자리를 전전했다. '신문 기자'라는 직함을 달고 있기는 했으나 먹고 사는 일은 힘들었다. 매춘부를 소재로 한 첫 번째 소설은 통속적이며 경박스럽다는 평가를 받았다. 새로운 소설을 구상하고 있던 그는 자신이 어렸을 적 마을 이웃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남북 전쟁(Civil War) 이야기였다. 일단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약간의 자료 조사를 해보았다. 마침내 모든 것이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으로 떠올랐다. 정돈되고 차분한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쟁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그저 군사 학교에 잠깐 다녔을 뿐인 풋내기 작가는 소설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는 그 작품으로 근대 영미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각인시켰다.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Stephen Crane(1871-1900)의 '붉은 훈장(The Red Badge of Courage, 1895)'은 전쟁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 소설은 전쟁의 외피가 아닌, 철저히 참전 군인의 내적 변화에 중심을 두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가 그려낸 것이 현실의 풍경인지, 주인공 헨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인지 종종 모호하게 느껴진다. 영화가 시작되면 내레이터가 영화의 원작자와 소설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한다. 그런데 소설을 읽은 이들은 도입부의 내레이션에서 어떤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겁 많은 소년은 전투를 통해 용기 있는 남자로 변모한다'. 과연 그러한가?

  1951년, 존 휴스턴(John Huston) 감독은 스티븐 크레인의 소설을 가지고 영화를 찍었다. 제작사는 MGM이었다. 영화에 대한 지독한 상업주의적 관점을 가진 제작사가 장차 자신이 만들 영화에 어떤 짓을 저지를지 휴스턴은 알지 못했다. 여자가 나오지 않는 영화는 흥행에 성공할 수 없다며 제작사는 반대했으나, 휴스턴과의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작을 승인했다. 휴스턴은 원작이 가진 반전(
反戰) 메시지에 깊이 공감했고, 그것을 영화로 표현해내겠다는 일념으로 작업했다. 2시간 가량의 영화는 첫 내부 시사에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자 MGM은 그것을 69분으로 만들어 버리고, 원본에는 없는 내레이션을 추가했다. 휴스턴은 절망했으나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누더기가 된 영화는 처참한 개봉 성적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소설의 도입부에는 주인공 헨리가 북군에 자원 입대하게 되는 짤막한 과정이 그려진다. 하지만 영화는 헨리의 신병 교육 훈련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이 영화의 어느 부분이 얼마나 잘렸는지 알지 못한다.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잘 돌보아야 한다고 다짐을 시킨다. 마음 아픈 어머니와는 다르게 헨리, 이 철딱서니 없는 청년은 전쟁에서 무공을 세우는 꿈에 부풀어 있다. 그는 무엇보다 '붉은 훈장(The Red Badge of Courage)'을 가지기를 열렬히 소망한다. 그것은 총상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의미한다.

  영화의 초반부, 오디 머피(Audie Murphy)가 연기하는 헨리는 겁 많고 어리버리한 신병처럼 보인다. 군대라는 낯선 조직,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부대원들, 거친 욕설과 농담, 그 모든 것에 헨리는 적응해야만 한다. 그런데 미처 적응할 시간도 없이 첫 번째 전투가 시작된다. 헨리는 전쟁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게 된다. 대기를 가득 채운 희뿌연 포연(砲煙) 속에서 적군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저 너머 남부군이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 내는 소리는 야수가 내는 것처럼 들린다. 영화는 헨리가 맞닥뜨린 전장터를 마치 비현실적이며 불길한 미로처럼 제시한다. 거기에는 전장터 주변의 자연 풍광도 한몫을 한다. 높이 자란 큰 나무 위에서 반사되는 태양빛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며, 새들은 끊임없이 지저귄다.

  존 휴스턴은 이 영화를 이야기 중심의 내러티브로 가져갈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는 주인공 헨리의 심리적 변화가 주를 이루는 원작 소설의 본질을 부각시키기 위해 독창적 구도로 인물들을 찍었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각도로 인물들을 화면에 꽉 채운 구도에서는 불안과 긴장이 느껴진다. 또한 전장터의 잔혹함과 대비되는 자연의 풍광과 소리를 강조함으로써 전쟁과 마주하는 헨리 내면의 주관적 인식을 보여주려 했다. 그것은 스티븐 크레인이 소설에서 중점을 두고 묘사한 부분과 정확히 일치한다.

  혹독한 두 번째 전투에서 결국 헨리는 부대를 이탈해 도망을 친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헨리는 그 인간적인 욕망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군인은 죽음을 무서워 하지 않고 싸우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도망쳤고, 패주하는 아군에게 맞은 상처를 적군에게 입은 것이라며 동료들에게 거짓말까지 했다. 자랑스러운 '붉은 훈장'은 헨리에게서 멀어지는 것만 같다. 그 수치심과 자괴감이 헨리를 다시금 일으켜 세운다. 이제 그는 부끄러운 자신의 과거를 넘어서기 위해 전장터의 선두에 나선다.

  영화는 전투의 참혹함을 비교적 온건하게 그려낸다. 아마도 제작사에 의해 삭제된 감독 컷은 좀 더 세부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절제된 장면들에서는 응축된 정서적 힘들이 느껴진다. 헨리의 친구 짐이 부상으로 죽는 장면 또한 연극적인 간결함으로 표현되었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언급한다면 빌 몰딘(Bill Mauldin)이 연기한 '큰 목소리 군인(The Loud Soldier)' 윌슨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다소 거칠고 시끄러운 인물로 묘사된 윌슨은 영화에서는 감성적이고 따뜻한 군인으로 나온다(그런 부분은 윌슨의 별명인 '큰 목소리'와 맞지 않는다). 그는 헨리를 연기한 오디 머피처럼 2차 대전 참전 군인이었다. 두 사람은 유럽 전선에서 복무했을 때부터 서로 안면이 있었다.  

  주연 배우 오디 머피에게 겁 많은 병사 헨리를 연기하는 일은 생소한 경험이었다. 참전 군인으로 미 육군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훈장을 다 받은 그는 전쟁 영웅이었다. 제대 후 경력의 전환을 꾀하면서 들어선 길이 '배우'였다. 존 휴스턴은 시원찮은 연기 실력의 초짜 배우와 작업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배우에게는 연기 말고도 문제가 더 있었다. 제대 군인으로서 머피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안정한 심리 상태로 촬영 스태프들과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때로 감독의 연출에는 촬영 중인 배우들의 심리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부분도 들어간다. 휴스턴은 인자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머피를 대했다. 그런 그의 인간적인 배려 속에 오디 머피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붉은 훈장'은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존 휴스턴에게 이 영화는 평생 아픈 손가락으로 남았다. MGM이 '붉은 훈장'에 저지른 횡포는 그를 각성하게 만들었다. 이후 휴스턴은 모든 영화 계약에서 필름의 감독 사본에 대한 권한을 명시하도록 했다. 비록 불완전한 형태이기는 하나 영화 '붉은 훈장'에는 휴스턴이 의도했던 메시지들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보게 된다. 이 영화는 결코 겁쟁이 청년이 전쟁에서 진정한 남자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보다는 전쟁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평범한 한 인간의 고통스럽고 치열한 내적 여정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이전의 자아를 지워버리고 전쟁을 수행하는 기계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다. '붉은 훈장'의 청년 헨리는 그 과정을 통해 '군인'이 된다. 관객은 이 새로운 남성성의 획득이 폭력과 죽음으로 점철된 비극으로 이어짐을 깨닫게 된다. 놀랍도록 독창적인 반전(反戰) 소설을 쓴 스티븐 크레인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떴다. 스물 여덟, 고흐처럼 살아생전에 주어지지 않았던 명예는 그의 사후에 빛나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 tcm.com   사진 중앙이 헨리 역의 Audie Murphy, 우측이 윌슨 역의 Bill Mauldin



**전쟁과 군인에 대한 다큐들

다큐 Restrepo(201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1-restrepo2010.html


다큐 Hell and Back Again(201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hell-and-back-again2011.html


다큐 Father Soldier Son(2020)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father-soldier-son2020.html
 
 
***존 휴스턴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 196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misfits-1961.html


****영화의 원작인 스티븐 크레인의 'The Red Badge of Courage'는 현재 우리말 번역본이 없다. 영문본은 www.gutenberg.org에서 다운받아서 볼 수 있다. 영미문학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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