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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DF 2022 상영작 리뷰 2: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Singing in the Wilderness, 2021)

 

그늘진 미래 속에 자리한 희망의 한 조각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Singing in the Wilderness, 2021)
천둥난(Chen Dongnan), 98분


  '작은 우물 마을'이라고 불리는 먀오족(苗族) 마을에는 교회와 성가대가 있다. 이 외진 곳의 소수 민족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신을 찬미하고픈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한 성가대의 노래는 지역 공산당 간부 장씨의 눈에 띈다. 그는 먀오족 성가대 홍보에 발벗고 나선다. 대부분 농사일에 종사하는 성가대원들은 TV 경연 프로그램에 나가면서 갑작스런 주목을 받는다. TV 출연도 하고, 합창 대회에서 나가서 상도 받는다. 과연 성가대원들은 그러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Chen Dongnan의 다큐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는 외견상으로는 먀오족 성가대의 이야기를 담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오늘날 중국에서 벌어지는 소수 민족의 암울한 현실이 조심스럽게 포개어져 있다.

  바깥 세상을 접하기 시작하면서 성가대원들은 물질의 가치에 경도되기 시작한다. 신기하고 멋진 도시의 풍광, 다채로운 상품들은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는 먀오족의 마음을 흔든다. 평상시에는 농부의 삶을 사는 성가대원들은 노래가 '돈'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경연 대회에서 우승한 상금은 성가대원들의 손에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매니저를 자처하는 당 간부 장씨는 성가대를 자기 치적 쌓는 도구로만 여길 뿐이다.  

  다큐는 특히 두 명의 성가대원의 개인사를 찬찬히 풀어놓는다. 신실한 신자인 Sheng은 성가대가 외부 활동을 하면서 세속의 노래들을 부르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에게 노래란 신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다. 성가대의 상업적 변질은 Sheng에게 좌절감을 안겨준다. 돈을 주는 행사 때에만 성가대에 나오는 이들이 늘어난다. 그렇게 성가대가 세속에 물드는 동안 Sheng은 동네 아가씨와 결혼한다. 작은 땅을 일구면서 사는 고단한 농부의 삶. 그는 불운하게도 한족 사기꾼 개발업자에게 땅마저 잃는다. 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은 Sheng의 소망은 여지없이 현실과 충돌한다.

  고운 목소리에 춤까지 잘 추는 Ping은 이웃 마을의 청년과 결혼한다. 가난하고 척박한 삶은 Ping을 노래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다닐 무렵, 마을에서 성가대 교육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 거칠고 이해심 없는 남편은 Ping의 활동을 반대한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Ping의 열망에 남편은 폭력으로 대응한다. 아이를 들쳐업고 Ping은 친정으로 돌아온다. 집에서는 애 딸린 여자가 어떻게 남편 없이 사냐고 돌아갈 것을 종용한다.

  그러는 사이 성가대는 해외까지 활동 반경을 넓힌다. 미국 링컨 센터에서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마을에는 성가대를 보기 위해 외국인 관광객들도 온다. 당 간부 장씨는 관광객들에게 유들거리는 말투로 홍보에 여념이 없다. 성가대를 교묘히 착취하는 이 사람의 처세술은 역겨움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먀오족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 면에서 중국 당국의 소수 민족 정책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열등한 부족민들에게는 교화와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 성가대의 인기와 명성은 높아가지만, 작은 우물 마을에는 그늘이 드리워진다. 한족 개발업자의 무분별한 개발과 땅투기가 마을을 옥죈다. 사실 그런 풍경은 중국내 소수 민족 자치주에서 벌어지는 흔한 일상일 뿐이다.

  농약을 들이마셨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Sheng, 고향에서 아이를 홀로 키우기로 결심한 Ping. 인생의 한고비를 넘긴 두 성가대원은 다시 노래를 부른다. 다큐는 Sheng과 Ping, 먀오족 성가대, 그리고 작은 우물 마을 사람들 앞에 놓인 미래가 장밋빛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제 더이상 전통 의상을 손으로 짜는 먀오족 여성은 없다. 새로운 세대의 먀오족들은 점점 더 많이 도시로 떠나고 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춤과 노래를 사랑해온 먀오족의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강건한 먀오족 여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Ping의 춤사위에는 그 희망의 기운이 실려있다. 


  
*사진 출처: eidf.co.kr



**티베트 출신 감독 페마 체덴(Pema Tseden)의 영화 리뷰
 
老狗(Old Dog, 201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old-dog-2011.html

塔洛(Tharlo, 201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3/tharlo-20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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