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기묘한 향수, 도련님(ぼんち, Bonchi, 1960)

 

  영화 '도련님(ぼんち, Bonchi, 1960)'은 번영하는 일본의 모습을 몽타주 쇼트로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거대한 공장들과 그곳의 굴뚝들, 도시의 빌딩숲,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 바야흐로 일본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고도 경제 성장 체제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쇼트는 크레인으로 촬영된 부감 쇼트이다. 늙은 남자는 후미진 골목의 낡은 목조 건물로 들어선다. 그는 조문을 하러 왔다. 거실에는 그 집의 주인 키쿠지와 두 아들이 있다. 머리가 허연 주인은 자신이 상인 집안의 후계자였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그렇게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철없는 도련님 키쿠지의 젊은 시절로 들어간다.

  영화의 제목 'ぼんち'는 오사카 거상(巨商)의 아들을 부르는 애칭이다. 전통적인 상업 도시였던 오사카에는 큰 부를 쌓은 상인 가문이 많았다. 영화의 주인공 키쿠지(이치카와 라이조 분)는 버선으로 일가를 이룬 상인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이다. 그런데 이 집안의 분위기는 어째 좀 이상하다. 키쿠지를 쥐락펴락하는 이들은 외할머니와 어머니이다. 키쿠지의 부친은 그저 가게에서 묵묵히 일만 할 뿐이다. 그는 집안의 대소사에 별다른 발언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키쿠지의 아내를 맘에 들지 않는다며 내쫒는다. 철없는 도련님 키쿠지는 그러거나 말거나 게이샤들을 끼고 사랑 놀음에 열중한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절대 결혼할 수 없다. 이 집안의 권력은 외할머니에게 있다. 외할머니가 거상 집안의 주인이며 키쿠지의 아버지는 데릴사위로 아무런 힘도 없다.

  배우 이치카와 라이조는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를 영화화한 '불꽃(炎上, Conflagration, 1958)'으로 스타의 길에 들어선다. 감독 이치카와 콘에게도 그 영화는 특별했다. '불꽃'을 통해 이치카와 콘은 자신의 영화적 역량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배우와 감독은 다시 만나서 영화를 찍었다. 영화사 다이에이는 오사카 출신의 소설가 야마자키 토요코(山崎豊子)가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제 서른을 앞둔 젊은 배우는 희끗한 머리의 중년 남자를 능청스럽게 연기해낸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이치카와 라이조의 재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영화는 가모장(家母長)의 권위에 휘둘려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는 키쿠지의 삶을 연대기로 보여준다. 방탕하고 분별력이 없는 도련님 키쿠지의 인생은 군국주의 일본의 흥망성쇠와도 겹친다. 감독 이치카와 콘은 개인의 인생과 시대가 겹치는 접점을 삽화적으로 제시할 뿐,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일본의 침략 전쟁이 확대되는 동안 키쿠지의 사업은 점차 기운다. 영악한 게이샤 애인들은 이 어리석은 도련님을 철저히 이용해먹는다. 연합군의 공습 속에 마지막 남은 창고를 지켜내기는 하지만, 키쿠지는 사업 자금을 애인들에게 다 나누어 준다. 외할머니는 가문의 몰락을 예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결국 거상 집안의 부는 키쿠지의 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돈과 사람으로 흥청거렸던 거상의 가옥은 이제 비좁고 추레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이치카와 콘은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철부지 도련님 키쿠지의 인생을 압축적으로 그려낸다. 그는 냉담한 혈족과 시대의 풍파 속에서 길을 잃었다. 키쿠지는 좋았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아들에게 결코 집을 팔지 않겠다고 말하는 키쿠지는 장사를 다시 시작할 거라는 희망도 갖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늙은 하녀는 젊은 키쿠지가 당당하게 집을 나서는 모습을 회상한다.

  영화 '도련님'은 표면적으로는 허랑방탕한 젊은 상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이 영화를 곰곰히 뜯어보면 거기에는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에 대한 기묘한 향수가 느껴진다. 가문의 부를 상속받은 키쿠지는 주색잡기에 아낌없이 돈을 쓴다. 도련님에게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었다. 분명히 키쿠지의 몰락은 그 자신의 무분별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댓가이다. 그럼에도 상인 가문의 오랜 전통을 끝장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전쟁'에 있다. 외부의 적대적 세력은 좋았던 시절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거기에서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은 결여되어 있다.

  영화는 오사카의 오랜 전통과 번영이 끝나버렸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은밀하게 드러낸다. '도련님'에서 보여준 이치카와 콘의 이러한 역사 인식은 그의 영화 '마키오카 자매들(細雪, The Makioka Sisters, 1983)'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이 영화는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 1886-1965)의 소설을 영화화했다. 주인공들은 오사카 상인 집안의 자매들이다. 복고주의적 감성의 끝판왕인 이 영화에서 전쟁은 고통이 아닌 그리움으로 자리매김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겠다.   



*사진 출처: kookaimorita.livedoor.blog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영화들

미스미 켄지 감독,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
무숙자(無宿者, On the Road Forever, 1964)와 검(劍, Ken, 1964)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on-road-forever-1964-ken-1964.html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
나카노 스파이 학교(Nakano Spy School, 196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nakano-spy-school-1966.html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
닌자(忍びの者, Shinobi no Mono, 1962)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shinobi-no-mono-1962-8.html

続・忍びの者(Shinobi no Mono 2: Vengeance, 1963)
新・忍びの者(Shinobi no Mono 3: Resurrection, 1963)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2-shinobi-no-mono-2-vengeance-1963-3.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자작시: 다래끼

  다래끼 무지근한 통증은 너와 함께 온다 나는 네가 절대로 그립지 않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부드러운 눈길을 기억한다 아주 약한 안약에서부터 센 안약까지 차례대로 넣어본다 나는 너를 막아야 한다 나은 것 같다가 다시 아프고 가렵다 나는 조금씩 끈기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물기를 머금은 염화칼슘처럼 끈덕지게 내 눈가를 파고들며 묻는다 이길 수 있니? 곪아서 터지게 내버려둘 자신이 없으므로 열심히 눈을 닦아주며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로 그렇게 잠들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자작시: 하이엔드(high-end)

  하이엔드(high-end) 싸구려는 항상 냄새가 나 짜고 눅진한 부패의 냄새 썩은 감자의 냄새는 오천 원짜리 티셔츠의 촉감과 비슷해 등고선(等高線) 읽는 법을 알아? 만약 모른다면 안내자를 찾는 것이 좋아 안내자의 등에 업혀 이곳에 올 수도 있지 더러운 수작, 아니 괜찮은 편법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멸을 내쉬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진 것 우리들만의 공론장(公論場) 즐겁고 지루한 유희 불현듯 당신들의 밤은 오고 부러진 선인장의 살점을 씹으며 낙타가 소금 바늘귀를 천천히 바수어내는 하이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