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복고주의적 감성으로 그려낸 제국의 시절, 마키오카 자매들(細雪, The Makioka Sisters, 1983)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 1886-1965)는 일본의 침략전쟁이 정점으로 향해가던 1943년에 이 소설의 상권을 발표했다. 소설에는 1936년부터 1941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오사카 거상 마키오카가의 네 자매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는 소설의 내용이 전시(戰時)와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후의 집필분에 대한 발표와 출간을 금지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종전 이후인 1948년에 소설을 완성했으나 이제는 연합군 총사령부(GHQ)의 검열이 문제였다. 전쟁을 미화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은 삭제할 것을 권고받았다. 마침내 1949년에 소설의 전권이 완간되었다(출처: ja.wikipedia.org).

  군국주의 정부 치하에서는 전시와 동떨어진 호사스러운 이야기로, 종전 이후 GHQ 통치 시절에는 전쟁 미화를 이유로 출판이 어려웠던 소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細雪)'에는 그런 배경이 숨겨져 있다. '부드럽게 흩날리는 눈'이란 뜻의 제목 '細雪'에서는 원작자의 유미주의적 감성이 느껴진다. 마치 1차 대전 직전의 서구 유럽 세계를 '아름다운 시절(Belle Époque)'로 부르는 것처럼 작가는 오사카와 고베를 중심으로 한 도시의 세계를 그렇게 바라보았다. 그의 그런 관점은 마키오카 가문 네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 '마키오카 자매들(The Makioka Sisters, 1983)'은 네 자매가 벚꽃놀이를 위해 모이는 회합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세 자매는 첫째 언니 츠루코가 오길 기다리면서 대화를 나눈다. 막내 타에코는 부모가 남겨준 재산에서 자기 몫의 혼인지참금을 달라고 둘째 언니를 조른다. 둘째 사치코는 큰언니 츠루코의 허락이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마침내 나타난 츠루코는 셋째 유키코가 결혼을 해야 타에코가 그 돈을 받을 수 있다며 그 요청을 거절한다. 이 집안의 가장 중대한 관심사는 셋째 유키코의 혼사이다. 매우 내성적인 성품의 유키코는 거듭되는 혼담에 지쳐있다. 츠루코는 마키오카 가문의 명망에 걸맞는 혼처 자리를 알아보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다. 그 와중에 자유분방한 막내 타에코는 남자 문제로 언니들의 골머리를 썩인다.

  비록 가세가 기울기는 했지만, 마키오카 자매들은 오사카 명문 거상 집안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가문의 실질적 수장은 장녀 츠루코로 츠루코는 동생들의 안위를 보살핀다. 그럼에도 대외적으로는 츠루코의 남편 타츠오가 '마키오카' 호적에 입적해서 가문을 대표하고 있다. 마키오카로 성씨를 바꾼 것은 둘째 사치코의 남편 테이노스케도 마찬가지. 이 집안의 남자들은 데릴사위로 마키오카 가문에 종속되어 있다. 네 자매 가운데  '마키오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를 가장 갑갑하게 느끼는 사람은 막내 타에코이다. 타에코는 불장난 같은 연애 사건으로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이 있다. 타에코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인형을 만들어 백화점에 납품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하층민 집안 출신의 사진사 이타쿠라와 결혼하려고 한다.

  마키오카 자매들에게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츠루코가 서른이 된 유키코의 혼담을 계속 결렬시키는 이유는 혼처 자리가 마키오카 가문의 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중년 남자의 재취(再娶) 혼담만 이어진다. 그럼에도 돈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속물적 판단을 거둘 수는 없다. 유키코는 자신의 결혼을 둘러싼 그런 압력에 완강히 저항한다. 계속 퇴짜를 놓으면서 진정으로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영화 '마키오카 자매들'에서 시대적 배경은 의도적으로 삭제된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의 광기가 점차 고조되는 때였다. 영화 속 마키오카 자매들의 삶은 매우 안락하며 그 어떤 어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유키코가 선을 보는 호사스러운 음식점. 어디선가 들리는 비감한 노랫소리는 전선으로 떠나는 군인의 송별회가 열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전쟁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묘사된다. 유키코는 기차 안에서 자신을 훔쳐보던 앳된 얼굴의 군인이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수그리는 것을 본다. 술에 취한 타에코가 술집을 떠날 때, 거리를 뒹구는 신문에는 일본 관동군의 중국 침략 소식이 실려 있다.

  전쟁의 현실과 유리된 중산층의 삶. 마키오카 자매들이 살고 있는 오사카는 진공의 세계와도 같다. 그곳의 시간은 느리고 평온하게 흘러간다. 마침내 유키코는 마음에 드는 결혼 상대자와 만난다. 귀족 가문의 차남인 이 남자는 마키오카가에서 찾는 구혼자의 조건에 부합한다. 유키코가 결혼으로 상류층으로의 계층 이동에 성공하는 것과는 달리, 타에코의 위치는 급전직하한다. 애인 이타쿠라의 갑작스런 병사로 방황하던 타에코는 술집 바텐더와 살림을 차린다. 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은 가문의 물질적 지원을 거절하고 재봉사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기로 한다.  

  영화 '마키오카 자매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40년대 제국주의 일본, 그리고 영화가 제작된 1983년이라는 시점 사이에는 무려 40년에 가까운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과연 영화가 개봉된 당시의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전쟁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는 벚꽃이 날리는 봄에서부터 세설이 내리는 초겨울까지, 마키오카 가문의 1년을 아름다운 화폭의 그림처럼 담아낸다. 그 풍광 속에는 비탄이나 눈물, 궁핍함은 물론이고 고통도 없다. 나라 안팎은 전쟁의 광풍이 몰아닥치고 있는데, 마키오카 자매들의 삶은 거기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존재한다. 츠루코는 유키코의 결혼을 앞두고 가보로 물려받은 값비싼 기모노를 온집안에 펼쳐놓는다. 촬영을 위해 특별히 대여한 수십억 원에 이르는 화려한 기모노를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에서 '전쟁'이라는 두 글자는 아스라이 사라져 버린다.

  이치카와 콘은 영화에서 전쟁의 공포와 패전의 수치심을 말끔히 제거하고, 오직 마키오카 가문 아씨들의 미시적 삶에 집중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있지만 냉철한 시대 인식이 결여된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감독 야마다 요지는 이와는 다른 관점에서 일본의 침략 전쟁을 비판한다. '어머니(母べえ, Kabei: Our Mother, 2008)''작은집(小さいおうち, The Little House, 2014)'에는 원로 감독의 날카로운 역사적 성찰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이치카와 콘의 안일한 복고주의 감성을 보여주는 '마키오카 자매들'은 실패작인가? 세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더이상 전쟁을 암울하게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면에서 '마키오카 자매들'은 그러한 인식의 변화를 나타내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영화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 원작, 도요타 시로 감독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猫と庄造と二人のをんな, 1956)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05/1956.html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 리뷰

어머니(母べえ, Kabei: Our Mother, 2008)
작은집(小さいおうち, The Little House, 2014)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2/yamada-yoji-voices.html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

자작시: 다래끼

  다래끼 무지근한 통증은 너와 함께 온다 나는 네가 절대로 그립지 않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부드러운 눈길을 기억한다 아주 약한 안약에서부터 센 안약까지 차례대로 넣어본다 나는 너를 막아야 한다 나은 것 같다가 다시 아프고 가렵다 나는 조금씩 끈기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물기를 머금은 염화칼슘처럼 끈덕지게 내 눈가를 파고들며 묻는다 이길 수 있니? 곪아서 터지게 내버려둘 자신이 없으므로 열심히 눈을 닦아주며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로 그렇게 잠들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자작시: 하이엔드(high-end)

  하이엔드(high-end) 싸구려는 항상 냄새가 나 짜고 눅진한 부패의 냄새 썩은 감자의 냄새는 오천 원짜리 티셔츠의 촉감과 비슷해 등고선(等高線) 읽는 법을 알아? 만약 모른다면 안내자를 찾는 것이 좋아 안내자의 등에 업혀 이곳에 올 수도 있지 더러운 수작, 아니 괜찮은 편법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멸을 내쉬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진 것 우리들만의 공론장(公論場) 즐겁고 지루한 유희 불현듯 당신들의 밤은 오고 부러진 선인장의 살점을 씹으며 낙타가 소금 바늘귀를 천천히 바수어내는 하이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