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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의 트라우마와 공포 영화 1부: 공포의 저택(怪談せむし男, House of Terrors, 1965)

 

1. 악령의 집에 구현된 일본 사회의 내면


  여자는 악몽을 꾸다 잠에서 깨어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여자의 남편 신이치는 정신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남편의 장례식, 여자는 주치의로부터 남편이 죽기 전에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남편의 얼굴을 보고 돌아서려는데, 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두 눈을 부릅뜬 시신은 무섭기만 하다. 여자는 남편의 입에 꽂아둔 국화꽃을 빼내려 하지만, 단단하게 맞물린 망자의 입은 열리지 않는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나고 변호사가 여자를 찾아온다. 그리고 남편이 여자에게 남겼다는 별장의 열쇠를 건넨다. 갑자기 미쳐서 정신 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던 남편이 언제 그런 별장을 샀단 말인가? 여자는 그 별장에 가보기로 한다.

  별장에는 곧 방문객들이 속속 도착한다. 미망인 요시에, 요시에의 조카 카즈코, 요시에의 삼촌이며 정신 병원 원장인 무네카타 박사, 주치의 야마시타, 야마시타의 여자 친구 아키코, 변호사, 그리고 자신이 요시에 남편의 애인이라고 주장하는 여자까지. 그들이 머물게 된 이 별장은 기괴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끼익거리면서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문들, 현관 중앙에 자리한 괴수의 동상, 어디선가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 사람을 공격하는 까마귀, 별장의 꼽추 관리인은 유령처럼 이곳저곳에 출몰한다.

  사토 하지메(佐藤肇) 감독의 영화 '공포의 저택(House of Terrors or The Ghost of the Hunchback, 1965)'이 제작될 무렵에 일본 영화계는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 TV의 등장은 영화 산업계에 닥친 천재지변과도 같았다. 이제 사람들은 영화관에 가는 대신에 거실의 안락한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것을 택했다. 헐리우드는 TV 화면이 보여줄 수 없는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와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된 역사극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그렇다면 일본의 영화사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사무라이들이 등장하는 시대극(時代劇, じだいげき)과 소시민의 정서에 호소하는 현대극(現代劇)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빠르게 대응한 곳은 니카츠(Nikkatsu, 日活)였다. 니카츠는 태양족 영화, 국경없는 액션 영화, 그리고 1970년대에 이르면 로망 포르노와 야쿠자 영화로 활로를 찾았다. 전통적인 일본의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서양 영화의 하위 장르를 모방하는 것에 관심을 보였다. 그 시기 토에이(東映)에서 제작한 영화 '공포의 저택'은 서구 공포 영화의 플롯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요시에와 방문객들은 곧 별장이 악령이 들린 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둘씩 사람이 죽어나가는 가운데 공포는 점차 극대화된다. 서양의 강신술로 영혼을 불러내려는 시도도 실패하고, 접신(接神)을 통해 원혼을 달래려던 무녀(巫女)도 죽는다. 이 영화에서 서구와 일본은 기묘하게 충돌한다. 별장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주디(Judy)'라는 이름을 불러대며, 근처 묘지에는 외국인들이 묻혀있다. 십자가 목걸이를 손에 꼭 쥐고 다니는 꼽추 관리인은 아무렇지 않게 살인을 저지른다. '공포의 저택'에는 서구 공포 영화의 문화적 요소가 하이브리드적으로 이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지배하는 근원적 공포는 일본 사회 내부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별장의 방문객들은 윤리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 무네카타 박사는 조카 요시에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 박사는 요시에의 소유가 된 별장을 요양원으로 개조할 생각이다. 요시에의 억압된 욕망은 박사를 통해 드러난다. 무네카타는 요시에가 병중의 남편과 동침하기 위해 병실로 찾아온 일을 비웃는다. 야마시타는 부잣집 딸과 결혼하기 위해 무네카타가 차지한 병원장 자리를 노린다. 그는 박사가 전쟁 중 만주에서 생체 실험을 자행한 일을 언급하며 협박한다. 변호사는 신이치의 내연녀와 공모해 별장을 뺏으려 한다. 일그러진 성적 욕망과 물질주의에 경도된 그들의 모습은 전후 일본 사회의 내적 심연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무네카타가 저지른 전쟁 범죄, 그 군국주의의 망령이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

  전쟁은 평화로웠던 저택을 악령의 집으로 만들었다. 원래 주인이었던 토미나가 남작은 침입한 군인에게 애인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다. 형의 원혼에 씌인 꼽추 동생은 살인마가 되어 방문자들을 모조리 처단한다. 은폐된 범죄와 악의 공간으로서 영화 속 저택은 전후 일본 사회의 죄의식, 불안과 두려움의 저장소이기도 하다. 야마시타는 이 저택의 문짝들이 제멋대로 열리고 닫히는 것은 집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감독 사토 하지메가 구현해낸 이 비뚤어진 공포의 집은 조지 로메로의 기념비적 공포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에서의 비좁은 농가를 연상케 한다. 좀비들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모인 그 집은 당시 미국 사회에 대한 은유를 내포하고 있다. 좀비에 대항하는 방법을 두고 격론을 벌이는 흑인과 백인, 결국 백인 토벌대에 의해 죽는 흑인 주인공의 모습에서 '인종 차별' 문제를 읽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공포의 저택'은 일본의 공포 영화가 전후의 트라우마를 소재로 독창적 장르 구축에 나섰음을 입증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조지 로메로(George A. Romero) 감독,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 1968)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7/night-of-living-dead-1968.html

***Nikkatsu(日活)의 국경없는 액션(Borderless Action) 영화
권총은 나의 패스포트(拳銃は俺のパスポート, A Colt is My Passport, 196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9/colt-is-my-passport-1967.html

****Toei(東映)의 야쿠자 협객 영화
메이지 시대 협객전 삼대의 이야기(明治侠客伝 三代目襲名, Blood of Revenge, 1965)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blood-of-revenge196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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