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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가 문화적 다양성을 포장하는 특별한 방법, 메이의 새빨간 비밀(Turning Red, 2022)

 

  남자는 어느 날 아침, 자신이 거대하고 흉측한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중편 소설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 비슷한 일이 13살 소녀 메이에게도 일어난다. 메이는 벌레가 아닌 붉은 털을 지닌 레서 판다(Lesser panda)로 변한다. 거울에 비친 낯선 자신의 모습에 메이는 혼비백산할 지경. 그런데 신기하게도 붉은 판다였던 자신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메이에게 일어난 것일까? 중국계 캐나다인 애니메이터 Domee Shi 감독의 '메이의 새빨간 비밀(Turning Red, 2022)'은 13살 소녀의 일상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도미 시가 2018년에 내놓은 10분 가량의 단편 애니메이션 'Bao(중국어로 '만두'라는 뜻)'의 주인공은 중년 여성이다. 그 단편은 장성한 아들과 멀어진 엄마의 내면을 응축적으로 담아내었다.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에 시달리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에서 도미 시는 13살 소녀 메이의 삶으로 들어간다.

  '헬리콥터 맘(helicopter mom)'. 메이의 일상은 엄마의 철두철미한 계획표에 의해 진행된다. 엄마 밍은 메이가 미래의 UN 사무총장이 될 거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 착하고 순종적인 메이는 그런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메이는 그런 엄마를 따르는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 사춘기, 친구들과 나눌 수 있는 비밀을 엄마한테 말할 수는 없다. 좋아하는 동네 오빠, 즐겨듣는 아이돌 그룹 4*Town의 노래... 딸의 일상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살피는 엄마에게 메이의 비밀은 곧 탄로난다. 밍은 딸이 좋아하는 남학생을 찾아가 모욕을 주고, 아이돌 그룹의 노래는 들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메이는 그런 엄마가 미우면서도 두렵다. 그런 와중에 메이는 붉은 판다로 변신하는 일을 겪게 된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노라면, 이민자 2세 출신인 도미 시가 지닌 '정체성'이라는 화두의 무게가 느껴진다. 단편 'Bao'에서 중년 여성은 만두를 먹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 모양의 만두를 발견한다. 여자는 아기 만두를 애지중지 키운다. 소년에서 어른이 된 만두는 점점 엄마와 멀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집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아들 만두. 눈물을 흘리며 붙잡아도 소용이 없자 엄마는 아들 만두를 꿀꺽, 삼켜버린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중년 여성이 마주한 정체성의 위기는 자식과의 관계에서 기인한다. 같은 아시아 문화권의 관객이라면 이러한 정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동양의 전통적 가족주의 문화에서 부모는 자식이 성인이 되어서도 매우 끈끈한 유대 관계를 이어간다. 그 독특한 부모 자식 관계의 틀은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헬리콥터 맘인 밍은 메이를 과도하게 통제하고, 메이는 그런 엄마의 착한 딸이 되려고 기꺼이 노력한다.

  도미 시는 중국계 캐나다인으로서 자신의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작품 속에서 드러내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메이의 엄마 밍은 집안의 가모신(家母神) 선예를 사당에 모시며 섬긴다. 메이가 붉은 판다로 변한 내력에는 이 가모신의 신화적 과거가 얽혀 있다. 전쟁에 나간 남자들을 대신해 자식과 마을을 지켜야했던 선예는 하늘로부터 비범한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렇게 해서 붉은 판다는 메이의 집안 여성들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삶 속에서 강인한 동물신의 능력은 숨기고 억눌러야만 한다. 메이의 엄마, 이모들, 할머니까지 그들은 모두 붉은 판다의 힘을 장신구 속에 봉인한다. 이 여성 혈족들은 메이도 자신들처럼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붉은색은 상서로운 색이야. 메이의 할머니는 그렇게 말한다. 중국인들에게 붉은색이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붉은 판다는 그렇게 중국의 가족주의와 페미니즘 서사에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 '붉은 판다'는 중국계 이민자 여성이 평생을 두고 씨름해야하는 정체성의 상징일 수도 있다. 가족의 주관하에 메이는 붉은 판다의 힘을 봉인해버리는 의식을 치룬다. 그러나 그 의식의 마지막 순간에 메이는 엄마와 이모, 할머니가 걸었던 길을 걷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새로운 세대의 여성인 메이는 자신이 충분히 붉은 판다의 힘을 통제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창조력일 수도, 민족적 정체성일 수도 있다. 메이의 그런 선택은 소녀에서 여성, 한 인간으로서의 눈뜸이 된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13살 소녀의 사춘기는 분명한 문화적 경계선을 가지며, 젠더적 각성과도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내게는 서구 백인의 주류적 가치관을 충실히 반영해온 디즈니가 이런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물론 디즈니의 주요 관심사는 문화적 다양성이 아니라 '돈'일 것이다. 중국은 매우 거대하고 매력적인 시장이다. 최근 몇 년 동안 할리우드는 그 시장의 관객들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기획, 제작해 왔다. 올해 미국에서 크게 흥행한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의 멀티버스(Multiverse)에는 중국 문화와 아시아인에 대한 조잡스런 패러디가 가득하다. 경박한 이 영화의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가 어떻게 미국 관객에게 먹혀들었는지 나는 아직도 궁금해 하는 중이다. 결국은 전통적인 가족주의로 서툴게 봉합되는 이 영화에서 건질 것이라고는 '재미' 밖에 없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와 비슷한 측면에서 '메이의 새빨간 비밀'도 분명히 중국계 이민자 문화에 대한 한정적이고 진부한 고정 관념에 매여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겉으로만 문화적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할리우드의 번지르르한 수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미 시는 거기에서 '즐거움'과 '감동'을 무난하게 이끌어 낸다. 영화 속에서 부드럽고 끈적거리게 늘어지는 4*Town 아이돌의 노래는 충분히 중독적이다. 메이가 수시로 변하는 붉은 판다, Lesser panda의 모습은 귀엽고 사랑스럽다. 중국계, 캐나다인, 여성 애니메이터가 첫 장편의 무난한 출발을 뛰어넘어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나름 기대가 된다.


*사진 출처: themoviedb.org


 

**한국계 미국인 영화 감독들의 작품 리뷰

정이삭 감독, 미나리(Minari, 2020)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minari-2020.html

Justin Chon 감독, Gook(2017)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4/la-justin-chon-gook2017.html

Andrew Ahn 감독, Spa Night(2016)와 Driveways(201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andrew-ahn-spa-night2016-driveways2019.html

Julian Kim, Peter S. Lee 공동 감독, Happy Cleaners(2019)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5/hyphen-happy-cleaners20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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