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EIDF 2023 감상기

 

  EIDF가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했다. 나는 2004년부터 매년 빠지지 않고 이 다큐 영화제를 챙겨서 보아왔다.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EIDF가 쌓아온 내공이 있을 텐데, 내 눈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이 영화제에서 활기나 창의성 같은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는 시의성도 실종되었고, 다양한 주제의 다큐를 다루는 포용성도 옅어졌다. 아마도 올해는 이제까지 내가 보아온 EIDF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한 해가 될듯 하다.

  EIDF 기간 동안 상영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는 D-Box 유료화(2021년부터 시행)는 매우 유감스럽다. 나는 'Festival'이 가진 환대와 참여의 정신을 EBS가 돈벌이로 환산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축제 기간 동안에는 관객이 출품작들을 무료로 볼 수 있게 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 덕분에 나는 본방송으로 열심히 출품작들을 챙겨서 보기는 했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 보았던 다큐들에 대한 짤막한 감상평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1. 이니나와(Ininnawa: An Island Calling, 2022)
   Arfan Sarban, 인도네시아


  라비아는 오랫동안 간호사로 일하면서 섬주민들의 건강을 보살펴왔다. 라비아는 은퇴를 준비하면서 딸 미미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전수하려고 노력한다. 미미는 섬주민들의 건강을 보살핀다는 사명감과 두 아이의 엄마로서 느끼는 모성 사이에서 고군분투한다. 다큐는 인도네시아 도서 지역의 열악한 의료환경을 부각시킨다. 두 모녀가 보여주는 직업적 연대의식과 감정적인 유대는 척박한 현실에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미미가 주민들, 특히 여성들의 질병을 진료하고 출산을 돕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이는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 의료인이 보건 정책에서 담당하는 특수한 위치를 보여준다. 평이하지만 나름의 울림을 가진 다큐.


2. 침묵의 집(Silent House, 2022)
  Farnaz Jourabchian, Mohammadreza Jourabchian, 이란


  파르나즈와 모하마드레자 남매는 자신들이 살아온 집의 역사를 탐구한다. 100년이 된 그 집을 통해 관객은 격동기 이란의 사회상을 관조한다. 3대에 걸친 가족의 고난과 시련은 '이란 혁명'이 보통의 이란 사람들에게 미친 미시사적 파장을 보여준다. 사진과 영상물을 비롯해 풍부하게 축적된 가족의 기록은 다큐의 사실성과 정밀함을 더한다. 감독 자신의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진 이 다큐는 사적 다큐가 역사적, 정치적 지평으로 확장된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 B급 며느리(선호빈, 2017)

  EIDF 2023에서 눈에 띄는 편성은 '다시 보는 다큐시네마'라는 섹션이다. 이것은 프로그램의 빈곤함을 메꾸려는 무성의한 시도처럼 보인다. 그 상영작으로 선정된 'B급 며느리'는 나름의 주제 의식을 갖고 있지만 시의성을 갖지는 못한다. 차라리 마민지의 '버블 패밀리(2018)'을 보여주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이 다큐는 부동산 공화국이라는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여전히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백래시: 디지털 시대의 여성 혐오(Backlash: Misogyny in the Digital Age, 2022)

  온라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여성 혐오에 대한 사회영상학적인 다큐.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의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은 온라인상의 협박과 괴롭힘에 대해 증언한다.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폭력이 실제 현실의 범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이 다큐는 온라인 혐오 범죄의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보다 강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매우 시의적절한 다큐.


5. 사빈 바이스, 한 세기의 기록(Sabine Weiss, One Century of Photography, 2022)

  사빈 바이스(1924-2021)는 프랑스의 여성 사진 작가이다. 남성들이 주류였던 사진계에서 바이스는 끈기와 창의성으로 자신의 사진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다큐는 자신의 진정성과 시대 정신를 사진에 녹여낸 바이스의 작품 세계를 관조한다.


6. 버퍼존(The Bufferzone, 권성윤, 2023)

  길 잃은 다큐. 이 다큐는 네팔의 치트완 국립 공원을 둘러싼 여러 관점을 보여준다. 야생 동물 보호와 원주민들의 삶이 충돌하는 지점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나름대로 시간과 노력을 들였음에도 이 작품은 주제의 선명성을 확보하는 데에 실패했다. 108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은 도대체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빈곤한 다큐 미학을 여실히 입증하는 작품. 


7. 안개 속의 아이들(Children of the Mist, 하레 지엠, 2021)

  EIDF에서 반드시 주목할 작품이 있다면 이 다큐이다. 베트남 소수 민족 소녀의 성장기는 여성이 견고한 인습의 벽과 마주하는 고통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다큐에 대한 리뷰를 나는 이전에 썼었다.

리뷰 링크: 소녀의 어린 시절이 끝나갈 때, Children Of The Mist(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3/04/children-of-mist2021.html



8. 그녀의 키친, 쉬 셰프(She Chef, 2022)

  재능있는 젊은 셰프 아그네스의 이야기. 관객은 요리에 대한 열정을 지닌 아그네스가 자신만의 요리 경력을 쌓아나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아그네스는 전쟁터 같은 주방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인간미 넘치는 동료들은 아그네스가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아그네스는 마침내 페로 제도의 소박한 식당에서 자신이 꿈꾸던 요리의 세계를 만난다.  


9. 다크 레드 포레스트(Dark Red Forest, 2021)

  EIDF 20주년 회고작. 이 다큐에 대한 리뷰는 작년에 작성했었다.

리뷰 링크: 수행자로 살아간다는 것: 다크 레드 포레스트(Dark Red Forest, 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eidf-2022-1-2021-2021.html


10. 세자리아 에보라, 삶을 노래하다(Cesaria Evora, 2022)
   Ana Sofia Fonseca, 포르투갈


  카보베르데(Cape Verde) 출신의 세계적인 가수 세자리아 에보라의 삶을 만난다. 다큐는 세자리아 에보라의 노래 속에 스며든 카보베르데의 정서,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세자리아 에보라의 팬이라면 이 다큐는 거를 수가 없다.


11. 헤어날 수 없는 아름다움,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 Disarming Beauty, 2022)
   Natacha Giler, 프랑스


  '밀로의 비너스'는 루브르 박물관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다큐는 이 조각상을 둘러싼 역사적, 미학적 관점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관객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 시대와 사람들 사이에서 공명하는 과정을 만화경처럼 볼 수 있다.


12. 콜 미 댄서(Call Me Dancer, 2023)

  20살, 인도 뭄바이에 사는 평범한 대학생 마니쉬는 춤의 매력에 빠져든다. 대학을 그만 두고 댄스 아카데미에서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마니쉬. 다큐는 5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꿈을 가진 청년이 그것을 이루기 위해 겪는 역경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극적인 구성을 가진 다큐. 마니쉬는 결국 춤꾼으로 불릴 수 있을까? 답은 다큐 속에 있다.


13. 안녕 내 사랑(Bella Ciao, 2022)
    Giulia Giapponesi, 이탈리아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민요 'Bella Ciao'는 언제, 누가 부르기 시작한 것일까? 다큐는 노래의 기원을 찾아나선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맞서기 위해 파르티잔들은 자유를 향한 열망을 이 노래에 담아 불렀다. '노래의 사회사'라는 주제를 흥미롭게 풀어낸 다큐. '안녕 내 사랑'은 재미와 유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멋지게 잡아낸다.


*사진 출처: facebook.com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적룡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The Magic Blade, 1976)

    영화의 제목이 독특하다. '천애명월도'라는 명검을 두고 벌이는 검객들의 혈투인가,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봤다. 그런 검은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이 영화를 지배하는 비장의 무기는 공작령(孔雀翎, 공작의 깃모양 무기로 막강한 화력을 지님)이다. '천애명월도(天涯明月刀, 1976)'는 '유성호접검( 流星蝴蝶劍, 1976)'을 만든 초원 감독의 작품이다.     검객 부홍설(적룡 분)은 강호의 일인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나 방랑 중이다. 그는 자신과 적대 관계에 있는 연남비로부터 흑도파의 우두머리 공자우가 공작령을 차지해서 강호제패를 노린다는 말을 듣는다. 공작령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함께 하게 된 연남비와 부홍설, 부홍설은 공작령의 주인이자 공작산장의 우두머리 추수청에게 공작령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추수청이 공자우의 밀정에 의해 죽게 되고, 추수청은 딸 옥정을 부홍설에게 부탁한다. 공자우는 자신의 부하 검객들을 보내 부홍설을 죽이고 공작령을 빼앗으려 한다. 그 와중에 연남비의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고, 추옥정은 납치된다. 부홍설은 공작령을 지키고, 옥정을 구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원작은 무협 소설 작가 고룡의 동명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전작이 있다. 말하자면 시리즈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변성랑자(邊城浪子)'가 그것으로 '부홍설'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 '천애명월도'는 부홍설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바로 연남비와의 대결에서부터 시작한다. 초원 감독은 캐릭터에 대한 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결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공자우의 본거지에 부홍설이 들어가기까지 너무나 많은 자객들이 나오고, 대결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볼거리 위주의, 철저히 흥행을 노린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관객들 시각에서

전후 일본 영화(Post-war Japan Movie, 1946-1955) 3편: 전후 일본 사회가 마주한 고통과 혼란,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

    노로는 고등학교 선생이다. 그는 과속을 하는 트럭을 피하려다 손을 다친다. 그가 받는 빠듯한 봉급으로 단칸 월세방 돈 내는 것도 힘든데 병원비까지 나가게 생겼다. 그는 학교에서 그의 봉급을 올려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깡패같은 고등학교 이사장은 노로에게 야간 고등학교 강의까지 더하라고 강권한다. 천성이 유약한 노로는 '아니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노로. 그는 자신의 제자가 권유한 반정부 시위에 나가보기로 한다. 시위대는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무참히 진압되었다. 노로는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겨우 풀려난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사장은 노로를 해고한다. 전후의 어려운 시절, 노로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이치카와 곤(市川崑, Kon Ichikawa) 감독의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 Mr. Pu, 1953)'는 고등학교 선생 노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후 일본 사회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만화가 있다. 만화가 요코야마 타이조(横山泰三)는 1950년부터 1953년  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에 4컷 만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를 연재했다. 4컷 만화에 담긴 날카로운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에 만화는 연재 중단의 압력을 받았다. 이치카와 곤은 그 만화에서 영화의 주요한 소재를 차용했다. 영화  '미스터 푸(プーサン)'는 명확한 서사 대신에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영화의 그러한 구성은 전후 일본 사회의 여러 면면들을 부각시킨다.    노로는 다친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간다. 그런데 의사는 노로의 몸을 진찰하더니 '영양실조'라면서 잘 먹어야 한다고 처방을 내린다. 젊은 의사는 환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노로가 의사에게 손을 치료받고 싶다고 하자, 의사는 병원의 X-ray 기계가 고장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전후

Shirley Clarke의 실패한 타자성 탐구, Portrait of Jason(1967)

  1. 이상한 나라의 Jason Holliday   한 남자가 자신을 소개한다. 자신의 이름이 Jason Holliday라고 말한 그는 본명이 Aaron Payne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유명한 재즈 연주자)와도 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가진 직업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가 말한 직업들 중에는 남창(whore)도 있다. 손에 술잔을 든 그는 심부름꾼(houseboy)으로 시작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늘어놓는다. 미국의 독립 영화 제작자 Shirley Clarke는 1966년 12월 3일, 자신이 머물던 첼시 호텔(Hotel Chelsea) 펜트 하우스에서 제이슨 할러데이의 인생 이야기를 주제로 다큐를 찍었다. 저녁 9시에 시작된 촬영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Portrait of Jason(1967)'이다.   제이슨은 술에 취해 기분이 아주 좋아보인다. 화면 밖에서 목소리로만 들리는 셜리 클라크는 제이슨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한다. 마치 인형극의 조종하는 사람(puppeteer)처럼 클라크는 제이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것 같다. 흑인이며 동성애자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소품으로 작은 공연을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소품 가방에서 꺼낸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는 제이슨은 여성스럽고도 우스꽝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며 킬킬거린다. 제이슨이 원하는대로 술과 담배가 계속해서 제공된다. 시간이 갈수록 술에 취한 제이슨의 말소리는 알아듣기 어렵게 뭉그러진다.   러닝 타임 1시간 45분의 이 다큐 'Portrait of Jason(1967)'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관객은 'Jason Holliday'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도록 초대받지만, 다큐가 끝나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가장 큰 이유는 제이슨이 가진 뛰어난 공연자(performer)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