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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자작시: 시인(詩人)을 찾는 6개의 목소리

  시인(詩人)을 찾는 6개의 목소리 1의 목소리가 말합니다 언제든 연기(演技)할 준비는 되어있어요 아줌마, 아저씨, 소년, 소녀, 늙은이,  그리고 나무와 돌멩이까지 그런데 말입니다 당신의 연출 지시는 너무 많습니다 아름다움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슬퍼도 울면 안된다는 거예요 기뻐도 살짝 웃는 둥 마는 둥 아버지를 아버지라 말하지 못하는 불쌍한 서자(庶子)처럼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 아, 이런 비유도 쓰면 안된다는군요 도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2의 목소리가 말합니다 나에게 연기 학원(演技學院) 다닌 적이 있냐고 물었지? 연기를 하려면 연기 학원에 다녀야 해? 청소부를 연기하려면 직접 청소부 일을 해봐야지 청소부 흉내를 낼 게 아니라 당신의 머릿속은 온통 비어있는 단어로 가득해 당신은 진짜 삶을 살아낸 적이 없어 공중 부양(空中浮揚)의 삶을 살고 있지 제발, 땅으로 좀 내려와 봐 3의 목소리가 말합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꽈배기의 달인 나는 똑바로 서 있고 싶은데 당신은 이렇게 말하는 거야 비틀고, 꼬고, 계속 움직여요! 그런 나를 보는 관객은 눈이 핑핑 돌아서 쓰러지고 말아 뭐, 특수 제작 안경을 쓴 소수의 관객이 나의 미쳐버린 춤을 보고 손뼉을 쳐주기는 하더군 그냥, 좀 자연스러운 춤을 추면 안되는 거야? 그나저나 당신, 춤 춰 본 적은 있어? 4의 목소리가 말합니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니죠? 안색이 창백해 보여요 밖에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멋진 옷도 입고 아, 돈이 없구나 그래서 나한테 부자 흉내를 내라는 건가? 말해봐요, 있어 보이는 부자의 질감(質感)이 뭔지 명품의 상표 딱지를 슬쩍 감추고 젠체하듯 걸으면 됩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 어설픈 부자 연기를 속아줄까요? 5의 목소리가 말합니다 당신의 문제는 말이야 너무 얼굴을 따진다는 거 달걀처럼 갸르스름하고 코는 자연스럽게 오똑하고 눈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피부는 희고 매끄러워야 뭐라고요? 내가 촌스럽다고요? 점을 빼고, 쌍...

자작시: 시집(詩集)

  시집(詩集) 1월의 어느 날이었다 길을 걷는데 분홍색의 보도블록이 말했다 시를 써보렴 아픈 발을 질질 끌고서 너의 목소리를 따라 너는 언제나 갑(甲)이었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낼수록 나는 괴롭고 조바심이 났다 시를 쓰는 것이 언제나 행복한 을(乙)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가난한 콜센터 노동자인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시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가끔, 네가 싫어져 잔가시가 삐죽삐죽 나 있는 볼품없는 막대기로 너를 때린 적이 있다 그러면 너는 그 보드라운 주먹으로 나를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너는 친절했지만 사소하게 무례했다  안녕, 이라고 말을 걸면 침묵했고 잘 가, 라고 말하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너에게 어떤 이별의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50편의 시를 가지고 강을 건넌다 누구도 얼른 떠나라고 등을 떠밀지 않았고 아무도 나에게 행운을 빌어주지 않았다 시인 것과 시가 아닌 것 시가 될 수 있는 것과 될 수 없는 것 시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그렇게 너는 한 권의 시집으로 남았다      

자작시: 늙은 기분

  늙은 기분 수옥아, 너 서른다섯이라고 했지 이제 늙은 기분이 든다고 그랬지 네가 말하는 걸 들으니 웃음이 나와 그래, 웃음이 미치도록 터져 나와 겨우 서른다섯 처먹고 뭐, 늙은 기분? 조금 늘어진 뱃살 때문에 옷장에 맞는 옷이 없다며 징징거리는 게 늙은 기분이냐? 머리털 좀 빠지고 팔자주름이 생겼다고 늙은 기분이야? 야, 넌 뭐 이제 겨우 서른다섯 처먹고 그렇게 얼간이처럼 사냐? 얘야, 늙는다는 건 말이다 후우, 한숨 좀 쉬자 그러니까 말이야, 늙는다는 건 아주 기분 더러운 일이지 암, 그래, 그렇구 말구 적어도 늙은 기분을 느끼려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도 저녁에 졸음을 주체하지 못해 소파에 몸을 구겨 넣고 바닥을 박박 긁는 저질 체력으로 여름을 나면서 땀을 미친듯이 흘릴 때 그게 눈물인 줄 착각하는 거야 팔아먹을 게 없어서 너의 그 병신같은 서른다섯 늙음을 팔아먹고 다니니? 좀 창피한 줄 알아 좌절은 그만 이 늙은 언니가 진심으로 충고할게 정신의학과에 가서 항우울제 처방을 받아 그럼 너의 늙은 기분은 쥐죽은듯이 사라질 거야

자작시: 우리의 시(詩)

  우리의 시(詩) 시를 몇 년 썼죠 그런데 돈도 안 되고 잘 써지지도 않아서 시를 버렸어요 아니, 어쩌면 시가 나를 버린 것인지도 몰라요 그럴 리가요 우리의 시는 당신을 버리지 않아요 우리의 시는 당신과 함께 행진했고 우리의 시는 당신과 함께 울었어요 물론, 우리의 시는 당신을 아프게도 했어요 당신의 속을 헤집어 놓고 당신을 막막하게 만들며 당신을 길 가장자리로 밀쳐냈지요 당신은 늙은 사람인가요?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의 목소리는 무슨 색깔인가요?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면 천천히 숨을 내쉬며 이렇게, 아, 에, 이, 오, 우 아름다움은 비참함에서 나오며 에러 코드(error code)가 떠도 당황하지 말고 이번 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오, 가을이 오는 소리를 우리의 시와 함께

자작시: 메뚜기

    메뚜기 우간다에는 메뚜기 사냥꾼이 있다 그곳에서 메뚜기는 인생역전의 아이템이다 메뚜기가 지나가는 언덕배기 작은 발전기에다 수십 개의 전구를 연결한다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드는 미쳐버린 빛 메뚜기들은 빛의 덫에 걸려 양철판때기에 우르르 쏟아진다 거대한 메뚜기의 무덤은 돈다발이 되고 사냥꾼들은 집을 사고, 결혼을 하고, 다시 메뚜기를 잡으러 간다 시장의 여자들은 메뚜기의 날개와 다리, 더듬이를 똑똑 떼어서 다듬는다 그리고는 펄펄 끓는 기름에 풍덩, 맛있는 메뚜기튀김 한 접시 뚝딱, 우간다의 국민 간식 메뚜기 메뚜기 다큐를 보던 가난한 시인은 자신도 메뚜기튀김과 같은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구멍이 숭숭 뚫린 뜰채로 시어(詩語)를 잡으러 나간다 그가 원하는 알맞은 단어들은 좀처럼 걸리지 않는다 겨우 잡은 비실거리는 몇 개의 글자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넣고는 컴퓨터를 켠다 2시간째, 모니터의 화면은 텅 비어 있다 시는 튀겨낼 수 없다 시를 먹는 사람은 없다 시는 메뚜기가 아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시가 된다        

자작시: 밤 한 톨

  밤 한 톨 아버지는 금식 중이었다 나, 저 밤 한 톨만 다오 호스피스(hospice) 병실의 누군가 건네준 삶은 밤을 아버지는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비닐봉지에 담긴 밤은 따뜻했다 의사가 아무것도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다음날 새벽에 눈을 감으셨다 그까짓 의사 말이 뭐라고 노란 밤 한 톨을 바람이 삐딱하게 걷는다 지 성질을 못 이겨 어느 산기슭의 밤나무를 후들겨 팰 때 늦여름의 밤 한 톨 가만히 울었다  

자작시: 사과(The apple)

  사과 미학(美學) 선생이 말했다 사과나무의 사과를 보고 따먹을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냥 세상 사람인 거죠 미학(美學)이란 말입니다, 사과의 그 빛깔, 그 모양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만드는 30년이 다 되도록 그 사과는 내 머릿속에서 매달려 있다 글을 써서 먹고 살 궁리를 하느니 손가락을 분질러 버려야지 자신에게 솔직해질 것 타인의 불행을 비웃거나 팔아먹지 말 것 통장의 잔고에 초연해질 것 실현 불가능한 글쟁이의 미학 찌그러지고, 흠이 있으며, 못생긴 풋사과 한 알 그러나, 아직 썩지는 않았어 사과를 한 입 베어 문다 미쳐버린 여름이 돋는다    

자작시: 전문가(專門家)

  전문가(專門家)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요? A가 말한다 많이 읽고 부지런히 쓰세요 수능시험 만점자가 교과서만 열심히 공부했다는 소리 같네 B가 말한다 요즘 잘 나가는 시인을 찾아가세요 시의 전문가 아닙니까? 돈은 좀 들어요 전문가의 고견을 듣는 데 시 한 편당 만 원, 그러니까  시 스무 편을 들고가면 이십만 원 피부가 타버릴 것 같은 개같은 날의 더위 검정 긴팔에 치마 레깅스의 여자 택배 기사가 허리가 휘어지도록 카트에 택배를 싣고서 지나간다 택배의 전문가는  고객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택배 상자도 단정하게 놓는다 택배 기사의 배송 수수료는 건당 700원에서 800원 언저리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하는 순전한 노동 기후 변화의 위기를 감내하는 당신은 진정한 전문가 부디 몸 상하지 않기를 존경을 담아 어느 입문자가

자작시: 싸구려에 대한 명상

  싸구려에 대한 명상 싸구려 복숭아를 샀다 조막만 한 게 단맛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괜찮아, 설탕을 좀 얹어서 먹으면 올해는 복숭아 풍년이라는데 또 싸구려를 사고 말았어 알다가도 모를 일 싸구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왜 이렇게 신맛이 많이 날까 신맛의 커피를 혐오한다 모름지기 커피는 쓴맛, 그것도 기름진 쓴맛이 나야 하거늘 싸구려 남방을 입고 나간다 4천 원짜리,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 남방을 입을 때마다 갑자기 무너진 봉제 공장에 깔려 죽은 먼 나라의 재봉사들이 생각나 언젠가 내가 입을 수의(壽衣)를 입듯 경건한 마음으로 오래전, 싸구려 비디오 가게에서 희귀 영화를 찾아다녔어 중년의 주인 남자는 친구들과 포커를 치고 있었지 타르코프스키(Tarkovsky)의 '희생'이 있나요? 그런 거는 우리 가게에 없어 비웃는 푸른 돛 문신의 팔뚝 싸구려는 사악하고 어리석어요 불타는 희생의 나무 싸구려에 절여진 통 속의 뇌를 가만히 응시하며 명상을 끝냈다

자작시: 책상머리

  책상머리 당신의 문제는요, 책상머리에 있어요 책 읽으면 그게 다 머릿속에 들어올 것 같죠 어디 글쟁이 나부랭이 강의 들으면 뭐 작품 하나 쓸 것 같거든요 책상머리는 맷돌입니다 당신은 맷돌과 함께 빙빙 돌아요 당신의 생각을 빻습니다 당신의 기이함을 삼킵니다 당신의 우울을 증폭시키죠 앗, 맷돌이 가라앉습니다 탈출하세요! 첨삭의 연필을 부수고 표절의 혓바닥을 조롱하며 따라쟁이의 몰개성에 욕설을 쪼개어진 책상머리 구겨진 안경다리 책상머리가 사라진 곳 진짜 이야기가 울기 시작합니다    

자작시: 화장실 청소(Cleaning the bathroom)

  화장실 청소 미치도록 더럽게도 하기 싫은 화장실 청소 집달리(執達吏)가 붙여놓는 빨간딱지 같은 화장실 청소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화장실 청소 하루 이틀은 미뤄도 되겠지 화장실 청소 며칠에 한 번 해야 할까 화장실 청소 묵어버린 검정 곰팡이는 죽어도 안 닦이는 화장실 청소 그래도 손목이 나가라 북북 문지르는 화장실 청소 청소하다 물기에 한 번쯤은 나동그라진 화장실 청소 그런데, 부잣집의 다섯 개짜리 화장실은 어떻게 청소하는지 궁금한 바보의 질문 아, 그건 당연히 사람을 써야지 부자가 손에 물 묻히는 거 봤어? 이거 안 하고 살아갈 방법은 없나 화장실 청소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있군 늙고 아파 요양원에 가면 안해도 되는 화장실 청소 나를 짝사랑했던 애새끼의 애처로운 눈빛을 외면하듯 누런 물때를 모른 척 해야지

자작시: 하이엔드(high-end)

  하이엔드(high-end) 싸구려는 항상 냄새가 나 짜고 눅진한 부패의 냄새 썩은 감자의 냄새는 오천 원짜리 티셔츠의 촉감과 비슷해 등고선(等高線) 읽는 법을 알아? 만약 모른다면 안내자를 찾는 것이 좋아 안내자의 등에 업혀 이곳에 올 수도 있지 더러운 수작, 아니 괜찮은 편법 차별하고, 배제하고, 경멸을 내쉬어 우리가 서 있는 곳 우리가 가진 것 우리들만의 공론장(公論場) 즐겁고 지루한 유희 불현듯 당신들의 밤은 오고 부러진 선인장의 살점을 씹으며 낙타가 소금 바늘귀를 천천히 바수어내는 하이엔드

자작시: 퇴고(推敲, Revision)

  퇴고(推敲) 너무 많은 커피를 마셨어 안구건조증에 걸린 눈은 튀어나올 것 같아 두통이 머리를 점령했으므로 타이레놀을 연거푸 세 알이나 검은 것은 글자인데 단촛물에 빠진 날벌레 같아 도대체 어디에서 굴러온 거야 이걸 왜 여기에다 날벌레를 짓이기며 차별과 배제의 한숨이 그냥, 여기에서 그만둬 버릴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다른 무엇 행운 따위를 믿지 마 재능은 집어치워 검은 점을 찍어 분명하고 신중하게 신참의 티를 내지 말고

자작시: 시작법(詩作法)

    시작법(詩作法) 매주 시를 써오고 다른 사람들의 시를 읽고 어쩔 수 없이 한마디를 해야 했지 내가 보기에 별로인 시를 시인 선생은 칭찬했고 또 내가 보기에 진짜 별로인 시는 요설(妖說)이라며 혹평하더군 세상의 추한 것을 시로 쓰지 마시오 시작법 안내서 38페이지의 조언 따위 그냥 모른 척 해야 하는 예를 들면, 마이너스 통장의 잔고 글만 빼고 모든 것이 엉망인 인생   8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건너편 아파트의 더위먹은 개는 계속 짖고 놀이터 옆 공터에서는 머저리 골퍼가 헛스윙을 당신의 스윙은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서드 포지션(3rd position)을 습득할 수 없어요 당신의 시는 나아가는 법을 알지 못하죠 확신을 가지고, 쉬운 것부터 천천히     *서드 포지션(3rd position): 바이올린의 학습에 필수적인 포지션. 이 포지션을 배워야 초급자는 중급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작시: 이야기

  이야기 아이들은 내보내세요 짹짹거리는 소리 감정은 한꺼번에 몰려오지 않아요 말하자면, 예열이 필요하죠 아, 시간은 얼마나? 글쎄, 나도 모르죠 프로페셔널이 되어본 적이 없어서 미리 말해두는데, 약간의 무대공포증이 있거든요 사람의 눈을 보는 것이 두려워요 눈에서 시커먼 물이 쏟아져서 물이 내 눈을 마시고 마침내 말을 토해내죠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 더듬거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아직까지 끝을 맺어본 적이 없어요 조명이 차례로 꺼지고 남아있는 건 먼지와 날벌레들뿐 집으로 돌아와 TV를 켜고 바닥까지 꺼진 소파에 나초칩을 부서뜨리면서 다른 바보들의 이야기를 들어요 목구멍에 들러붙은 날벌레 세 마리를 뱉어내었어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뭐라구요? 다음 공연이 취소되었다구요? 그래도 이야기는 to be continued

자작시: 비평(批評)

    비평(批評) 거지같은 물건을 멋지게 포장해내는 당신의 손기술은 놀랍습니다 소매치기가 되었더라면 한 도시를 당신의 소매에 감추었을지도 당신의 가게 앞에는 어수룩한 손님들이 어수선하게 줄줄이 모두들 당신의 포장 기술에 감탄하며 리본 쪼가리라도 얻어갈 심산으로 당신은 진심으로 포장의 대가입니다 값비싼 재료도 아끼지 않습니다 내몽골의 사막여우 가죽 안데스산맥의 비쿠냐(vicugna)털 또 뭐가 있었는데 아무튼 돌을 팔아 돈을 받는 돌팔이 돌멩이를 멋진 상자 안에 차곡차곡 채워 넣고는 당신의 가게 밖에 전시합니다 어떤가요? 이것은 포장의 미래입니다 알맹이 없는 찬사의 미래 더러운 주단(紬緞) 위에서 외치는 주례사 당신의 포장을 증오합니다 당신의 오만함에 침을 뱉습니다 당신이 만들어낸 상자에게 영원한 야유를 보냅니다 그것은 잊혀질 것입니다 사람들을 기만하는 당신의 더러운 손기술도 함께        

자작시: 갈색개(The brown dog)

    갈색개 갈색의 큰 개는 고요히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늙은 여자는 연신 목덜미를 훔치며 오래전, 녀석은 가끔 큰 소리로 짖었고 목줄 없이 놀이터에서 날뛰던 날도 있었다 셰퍼드(shepherd)와 도사견(土佐犬)의 그 어디쯤 우연의 계보(系譜) 어쩌다가 늙은 여자와 어쩌다가 비 올 구름의 여름날에 집에 가기 싫다며 화단의 흙더미에 얼굴을 파묻고는 얘, 그건 예뿐이의 똥이야 누런 염색 머리의 60대 여편네가 끌고 다니는 개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목줄을 한없이 늘이면서 예뿐아, 넌 행복하니? 행복이라는 말은 금지 천둥이 쏟아진다 갈색개가 울며 집으로 간다

자작시: 참조(參照)

  참조(參照) 화살표를 따라가십시오 노란 플라스틱으로 된 매끄러운 화살표 말입니다 화살표를 의심하면 안됩니다 믿음, 믿음이 중요합니다 화살표는 안정적인 길을 제공합니다 건너편의 진창길이 보이지요? 저기엔 화살표가 없습니다 불안과 공포, 그걸 맞닥뜨리려거든 거기로 가십시오 당신이 화살표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잠깐, 접어두십시오 당신의 뇌세포는 말라버렸으며 열정은 장맛비에 눅눅하기 짝이 없죠 화살표를 따라 가던 길이나 열심히 진창길에서 속사포를 쏘아대는 미친 인간을 조심하세요 그들은 당신이 화살표를 따라가지 못하게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화살표에 마음을 묶고 시간을 죽이며 노래하려는 입을 틀어막으십시오 순응은 축복이며 무기력은 평화입니다 화살표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자작시: 열대야(熱帶夜)의 아침

  열대야(熱帶夜)의 아침 머릿속에는 회색의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창밖에서는 에어로빅 음악이 개 짖는 소리처럼 중년 여자들의 출렁거리는 뱃살의 쓰나미 마침, 우롱차는 바닥을 드러내고는 돈을 주세요! 찻물이 끓기까지 10분 동안 아침 뉴스를 읽는다 아령을 몸에 매달고 강물에 몸을 던진 독거 남자의 비극 외로움과 가난은 늪과 같다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아오리 사과를 깎다가 칼날이 스윽, 푸른 피가 나오려다 얼른 들어가 버렸다 이 세상이 싫은 것이다 매미가 운다 어차피 한철 그래도 살아야지 눈부시게 터지는 더위 열대야의 아침

자작시: 그곳

    그곳 그곳이 특별했던 이유는 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네가 떠난 뒤에야 깨달았다 이제 나는 네가 앉았던 그곳에 오도카니 앉아 너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눈물이 이유 없이 흐른다 마지막으로 남은 휴대용 티슈 한 장을 뽑는다 늙음이란 싸구려 미용 티슈 같은 것 얇고 거칠고 쓰라려 조금만 세게 닦아도 생채기가 난다 그래도 쓰다 보면 익숙해져 청춘은 무료하고 무지했으며 무자비한 일상이었다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바투 자른 손톱으로 아픈 눈가를 세게 문질렀다 그곳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므로

자작시: 폭발하는 밤

  폭발하는 밤 누군가 그에게 귀띔합니다 당신의 집에 불이 날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한달음에 집으로 갑니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아픈 아버지가 두꺼운 이불 아래 겨울 몽고의 마눌(manul) 고양이처럼 고요히 부풀어 있습니다 벽은 시뻘건 열기로 금이 가있고 어디에선가 끓는 소리도 들립니다 임계점(臨界點)을 느낍니다 콘크리트와 나무와 뼈와 살 폭발하기 직전입니다 아버지, 눈을 뜨세요, 제발요 남자는 너무나 무서워서 더는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문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 순간, 눈을 뜬 아버지가 거적때기같은 이불을 두르고 휘청휘청 걸어 나오는군요 집이 폭발합니다 밤이 소리를 냅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바보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내다 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자작시: 여름, 오후 4시

  여름, 오후 4시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혼자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있다 가만가만 숨을 내쉬며 천천히 부채질한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늘 그 시간에 나오는 동네 사람들 누런 염색 머리의 늙은 여자는 비척거리며 걷는 아픈 개를 풀어놓고 말 많은 영감은 젊은 날을 늘어놓는다 누군가 쪄온 옥수수를 나누어 먹으며 그들만의 정겨운 오후 4시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검은색 스카프를 두른 외로움이 할머니의 어깨 위에 앉아서 재잘거리는 소리를 낸다 어디를 가시오? 이쪽 집에서 저쪽 집으로요 행인이 상냥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