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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자작시: 시래기

  시래기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는 복도식 아파트가 있다 엊그제, 그곳을 지나가다가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1층에 사는 어느 주민이 빨래 건조대에다 시래기를 잔뜩 널어놓았다 아니, 저걸, 왜, 저기에다가, 저럴까? 아마 베란다는 빨래를 말려야 하니까 시래기가 복도로 밀려난 것일지도 모른다 복도가 공용 공간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1층은 바로 흡연자들의 담배 연기가 직접적으로 흘러드는 곳이라는 점에서 시래기를 말리기에 매우 부적합한 곳이다 마침 젊은 남자가 담배를 꺼내어 물고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남자의 팔뚝에는 알아볼 수 없는 한문(漢文)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담배 연기에 한자들이 천천히 분해되며 날아가는 것 같았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시래기는 거무튀튀한 점이 되었다 

자작시: 단맛

  단맛 올해는 감이 풍년이다 한번도 해본 적 없는 곶감을 만들겠다고 베란다에 감을 깎아 걸어 두었다 70개의 감이 옷걸이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곶감은 바람이 불고 서늘한 날씨에 잘 마른다 그런데 올가을은 늦더위가 이어졌고 습도가 높았다 감에는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고 날벌레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재앙이었다 단맛에 환장한 날벌레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어 미친듯이 곶감에 들러붙었다 날벌레를 내쫓으려 선풍기를 틀고, 계핏가루를 뿌려 보아도 별 소용이 없었다 모기장조차 날벌레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베란다는 날벌레의 만찬장이었다 갑작스러운 한파 주의보에 날벌레들이 좀 얼어죽기는 했다 하지만 벌레들의 끈질긴 생존력은 놀라웠다 그들은 다시 풀린 날씨에 생기를 되찾고 마음껏 단맛을 빨아들였다 곶감은 단맛을 수탈당하면서 어설프게 말라갔다 나는 날벌레들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너희들도 먹고 살려고 그러는 거겠지 나는 문득 지나온 인생에서 단맛이란 것이 있었던가를 생각했다 단맛의 기억은 희미하고, 나이가 들수록 단맛이란 만병의 근원이 될 뿐이다 곶감 만들기는 실패했다 베란다의 곶감은 모두 냉동실에서 잠들어 있다 단맛을 잊지 못한 날벌레들은 곶감이 사라진 베란다를 일주일 넘게 떠나지 못했다 나는 벌레들의 마지막 만찬을 준비했다 식초와 설탕, 그리고 주방세제를 풀어서 그릇에 담아 내놓았다 단맛을 잊지 못한 날벌레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눈이 내렸고, 가을이 서둘러 지나가는 소리를 냈다

자작시: 삐짜(a.k.a. B급)

  삐짜 오늘 내가 받은 고구마의 택배 운송장에는 '호박고구마 특상 사이즈 비품'이라고 되어있다 비품은 B급, 삐짜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고구마의 상품페이지에는 전혀 다른 말로 쓰여있다 실속절약형 로얄과, 도대체 이 상품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입 고구마는 진짜로 새끼 손가락 크기의 고구마이며, 못난이 고구마는 정말로 지질하게 못생긴 고구마이다 이와는 달리 실속절약형, 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의뭉스러움은 약간 '흠' 있는 상품을 보내드린다는 판매자의 해명으로 해소가 된다 그렇다면 그 뒤에 붙는 로얄과의 뜻은? 그것은 운송장의 '비품'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무언가 비정상적인 경로로 들어온 상품을 뜻하는 삐짜를 척하니 써놓은 판매자의 무신경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자기들 물류센터 알바가 혹시나 로얄과를 포장해서 보낼까봐 그렇게 확실하게 삐짜, 라고 글로 못을 박은 것이리라 그런데 고구마에는 로얄과, 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입, 중, 특상, 대, 특대, 이렇게 대략 5가지 크기로 판매된다 특상이 제일 비싸고, 아주 작거나 큰 것은 싸다 그러니까 내가 주문한 실속절약형 로얄과의 실체적 진실이란 '특상 크기의 삐짜'인 것이다 royal을 지향하지만 그 끄트머리에 닿을 수 없는 실속절약형 비품 고구마의 비애는 이 고구마의 못생긴 자태로도 입증된다 나는 아주 잘 드는 필러로 고구마 껍질을 박박 깎아내고는 모두 다 냉동실에 넣었다 주홍빛이 도는 호박고구마가 맛이라도 로얄이기를 바라면서   

자작시: 김장

  김장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데 이제 막 담근 것처럼 보이는 김장 김치 한 포기가 버려져 있다 왜 버렸을까? 고춧가루 양념이 적은지 그 배추는 허여멀건했다 맛이 없어서 그런 건가? 고춧가루를 좀 듬뿍 넣고, 젓국도 좋은 걸 쓰고, 갓도 싱싱한 것으로 썰어넣어야지 버려진 김치에서도 나는 엄밀하게 맛을 감지해낸다 2주일째 베란다 우수관으로 흘러내려가는 어느 집 배추 절인 물냄새를 맡으니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제는 아랫집에서 멸치젓국을 끓였는데, 그 역겨운 냄새가 온 집안에 광기처럼 스며들었다 남도 사람인가 보네,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엄마도 김장을 할 때 그렇게 멸치젓국을 끓였다 이제 엄마는 김장하는 법을 잊어버렸고, 나는 엄마에게서 김치 담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매운 것을 먹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김치 없이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래도 엄마의 친정에서 보내준 남도 김장 김치 한 쪽을 대충 잘라서 밥도 없이 그냥 먹었다 알싸한 눈물이 나는 맛이었다 김장을 해서 택배 상자가 터지도록 꽉꽉 눌러서 보내준 오래전 그 엄마의 마음이 있던 날도 함께 흘러내렸다       

자작시: 감나무

  감나무 베란다 앞쪽 감나무는 올해 그 혹독한 여름 더위를 견뎠다 가을로 넘어가면서 감이 주홍색으로 익어갔는데, 그것이 멀리서 보면 고운 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감들이 모두 사라졌다 아마도 그 감나무에 눈독을 들인 누군가가 죄다 따서 가져간 것 같았다 화단은 주기적으로 수목 소독을 하는데, 독한 농약 뒤집어쓴 감을 따다가 뭘 얼마나 먹겠다고 저러는가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밖에서 웬 남자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큰소리를 쳤다 동대표 마누라면 다야? 어디서 경비를 종 부리듯 부려? 울그락불그락한 남자 옆에서 늙고 키 작은 경비 할아버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네가 뭔데 참견을 해? 여자도 지지 않고 뻔뻔하게 대거리를 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동대표 마누라가 경비에게 감을 따게 시켰던 모양이다 그걸 본 어떤 주민이 분노해서 그렇게 싸움이 벌어졌다 감나무를 보면, 가끔 그 일이 생각난다 올해는 감이 풍년이라 감도 싼데, 소독약 범벅인 감나무에서 감을 악착같이 따가는 사람이 있다 그나마 따기가 힘들었는지 꼭대기에 감 한 개가 덩그마니 남아있다 겨울에 새들이 잠시나마 단맛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자작시: 미용실

  미용실 아침에 일찍 눈이 떠졌다 오늘은 머리를 자르러 가야 한다 시장 뒷편에 있는 작은 미용실은 언제나 손님으로 복작댄다 9시, 미용실 아줌마가 문을 여는 시간이다 시장통(市場通)은 한산하다 그래도 댕기 머리 여자의 가게는 손님이 좀 있다 여자는 십몇 년째 댕기 머리 가발을 쓰고 있다 가발에는 언제나 먼지가 그득했다 하지만 가져다 놓은 채소는 정갈했고, 가격도 저렴했다 그래서 손님이 많은 것이다 전에는 좌판에서 팔더니, 이제는 번듯한 가게도 갖고 있다 여자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아들 하나가 법대에 갔다고 자랑했다 이제 세월이 흘렀으니 그 법대를 졸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자의 먼지 낀 댕기 머리는 여전했지만, 찌들린 얼굴은 조금 펴졌다 조금 지나가면 반찬 가게가 나온다 그 집에서는 전도 부쳐서 파는데, 더럽게도 맛이 없다 어느 해 명절에 엄마는 더이상 제사 음식을 만들지 않겠다며, 그 가게에서 전을 샀다 그 집 전에는 맛의 영혼이라고는 1그램도 들어있지 않았다 주인 여자는 매우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여자는 자기 아들을 데리고 재혼했는데, 새 남편의 재산을 자기 아들 앞으로 해놓으려고 애를 썼다 새 남편의 자식은 구박을 받고 산다고 들었다 사람 사는 곳에서 소문이란 연기처럼 흐르며 스며든다 드디어 미용실이 보인다 가게 문 앞에 덥수룩한 머리의 중년 남자가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다 남의 가게 앞에서 저게 뭐람, 그런데 미용실의 네온등이 돌지 않는다 가게 안에는 수건이 줄줄이 널어진 건조대가 보였다 10시에 온대요, 10시 남자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남자도 아침 일찍 머리를 자르러 와서는 미용실 문이 닫혀 있으니 짜증이 치밀었을 것이다 남자의 외투에는 허연 시멘트 가루가 묻어 있었다 몸을 쓰는 거친 일을 하는 모양이다 오늘 머리 자르는 일은 글렀네 나는 얼른 발길을 돌린다 다음번에는 아줌마가 제 시간에 나오겠지 늘 TV 조선을 틀어놓고, 야당놈들은 죄다 나쁜 놈이며, 돈 벌어서 땅과 집을 사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인 미용실 아줌마의 정갈한 ...

자작시: 다른 길

    다른 길 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며칠 후, 강남의 어느 아파트에서 고 3학생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도 투신 자살이었을 것이다 오래전, 청소년 자살에 대한 다큐를 만들려고 준비를 했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가 알아낸 중요한 사실은 청소년들이 죽음을 결심할 때 아주 확실한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었다 청소년 자살에서 투신자살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어느 과학고등학교에서 여고생이 투신자살했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죽음의 이유를 캐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 좋은 다큐를 만들겠다는 내 결심은 공수표(空手票)가 되어 멀리멀리 날아갔다 아주 가끔, 나는 그 여고생이 왜 죽었을까, 생각하곤 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살아있는 사람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많은 죽음이 어스름 저녁놀처럼 금세 잊혀진다 죽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다고 누군가 말해준다면, 그들은 다른 길을 향해서 걸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부서지고 잃어버리고 병들고 시간에 뒤틀린 다리를 질질 끌면서 묻는다 살아있어서 행복한가? 다른 길이 낫다고 말할 자신이 있는가? 어차피 죽음은 뚜벅뚜벅 다가온다 죽음을 향해 더 빨리 달려가지 않겠다고 자그맣게 되뇌면서, 오늘도 옥상에서 바람의 방향을 가만히 가늠하는 너에게 다른 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자작시: 알락할미새(White wagtail)

  알락할미새 과일칼을 씻다가 엄지손가락을 쓱, 베었다 칼이 들어오는 느낌은 너와의 이별과도 같다 이 칼은 주름이 진 칼이라 손가락 안쪽에 주름의 상처를 만들었을 것이다 피가 점점이 배어 나온다 왜 다쳤을까? 딴 데 정신이 팔려서 그랬을 것이다 널 생각했기 때문이다 엊그제 꿈에 알락할미새가 보였다 날개를 접었다 폈다 느리게 빠르게 기울이며 새는 쓰레기통 위에 잠시 앉았다 그러다가 날아가 버렸다 나는 알락할미새의 소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 새는 곁을 쉽게 주는 새가 아니었다 네가 나에게 준 손톱 같은 곁을 생각했다 손톱이 부러졌고 너는 날아갔다 나는 쓰레기통 앞에서 붉어진 눈으로 오래도록 서 있었다 

자작시: 점(點)

  점(點) 우리는 한 점에서 만났다 봄이었다 함께 걸어갈 수 없다 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제, 너는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끝이다 우리는 처음 만날 때부터 서로 그 한 점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빛나던 너의 얼굴은 노래를 잃어버렸고,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가을이다 뒤돌아 걷는다 한 점이 멀어진다

자작시: 니하오마(你好吗)?

  니하오마(你好吗)? 엄마가 화장실의 전등불을 깜빡하고서는 끄지 않으셨다 엄마, 화장실 불을 꺼주세요 엄마는 화장실 안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뭐하세요 아, 그게 말이다, 화장실 불을 끄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하고 있었어 엄마, 스위치는 화장실 밖에 있잖아요 그렇지, 그렇구나, 그게 생각이 나질 않았어 나도 모르게 웃었다 예전 같으면 심각한 일이겠지만 이제는 그저 웃음이 나온다 허탈한 웃음 오늘은 엄마가 저렇구나, 하고 웃는다 엄마의 뇌는 무지막지하게 기억을 지워나가고 있으므로 화장실 불 끄는 법을 잠시 잊는 것은 대단한 일도 아니다 나의 노후 대비는 근력 운동인 크런치(crunch)를 매일 60개 하는 것과 중국어 공부이다 근력 운동을 하는 이유는 나중에 요양원에 가게 되더라도 나 혼자 힘으로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이다 노년에 대한 다큐를 보는데 일본의 아흔 살 넘은 할머니가 요양원에서 매일 틈만 나면 체조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 할머니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자기 힘으로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그렇게 체조를 한다고 했다 할머니는 아주 천천히 걷고 움직이며 맨손 체조를 했다 그 할머니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내가 중국어 공부를 하는 이유는 외국어 공부가 치매 예방에 좋기 때문이라는 과학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제 5년 되었나, 중국말을 들으면 대충 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있다 물론 독학이라 회화는 거의 초급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니하오마(你好吗)? 당신, 잘 지내나요? 나는 머리가 허옇게 된 미래의 나에게 미리 그렇게 말을 걸어본다 그 안부 인사에 대답을 하게 될 나는 내 힘으로 화장실에 갈 수 있고, 치매에는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아주 소박한, 그렇지만 간절한 바람으로 오늘도 중국어 공부를 하다가 묻는다 니하오마(你好吗)?   

자작시: 낭중지추(囊中之錐)

    낭중지추(囊中之錐)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2)'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을 쓴 사람은 필립 K. 딕(Philip K. Dick)으로 그는 기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언젠가 필립 K. 딕의 삶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다 다큐는 그가 어떻게 해서 SF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그의 작품 세계와 개인적은 삶은 어떠했는지 자세하게 풀어놓았다 그 다큐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필립 K. 딕이 왜 다작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는 돈이 필요했다 아주 절실하게 필요했다 당시 그가 기고했던 잡지들은 글자 수대로 원고료를 지급했다 그래서 필립 K. 딕은 자신의 글을 엿가락처럼 늘려서 쓰기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타자기는 글자를 찍어낼 때마다 돈을 만들어내는 마법의 기계가 된 셈이다 물론 원고료는 박했으므로 필립 K. 딕은 미친듯이 글을 써냈다 그렇게 글을 써서 돈을 받아도, 돈은 계속 빠져나갔다 순탄치 못한 사생활이 문제였다 거듭된 이혼으로 위자료를 비롯해 양육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니까 필립 K. 딕은 생계를 위해 필사적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는 44편의 장편과 121편의 단편 소설을 남기게 되었다 돈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은 경멸할 만한 일인가? 적어도 필립 K. 딕에게 돈은 아주 매력적인 동인(動因)이었다 물론, 그가 열심히 글을 썼어도 사람들이 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만들어 내었고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글을 썼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글을 좋아할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내 생각에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건 어떤 면에서 운(運)의 영역에 속한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과 그것을 알아주는 독자와 만나는 기가 막힌 운의 때 같은 것,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진정한 의미는 어쩌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송곳이 날카로워서 주머니 밖으로 비어져 나온다고 해도, 제...

자작시: 목련차

    목련차 나는 감기가 오면 주로 목으로 온다 목이 심하게 붓고 아프다 어디서 들으니, 목련차가 목과 코감기에 좋다고 했다 목련차는 봄에 핀 목련꽃을 따서 그 꽃잎을 말려서 사용한다 말린 꽃잎은 잘 달구어진 팬에다가 아주 살짝 덖어준다 그렇게 해서 만든 목련차를 뜨거운 물에 우려서 마신다 그렇게 목련차를 만들어서 마셔봤는데, 이게 효과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뭔가 애매한 지점이 있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면 목의 통증이 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기껏해야 차 따위로 질병을 치료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목련차를 마시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목련차의 약리적 성분은 무엇인가? 아무리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적거려봐도 속시원한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목련꽃에 있는 정유(精油) 성분은 대개의 식물의 잎과 꽃에서 추출할 수 있는 휘발성 기름이다 어떤 자료에서는 목련꽃의 알칼로이드 성분이 약효를 갖는다고도 했다 알칼로이드(alkaloid)는 쓴맛, 말하자면 일종의 약한 독(毒) 성분에 가깝다 식물도 곤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무기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목련차의 효능이라는 것은 그냥 민간요법의 플라시보 효과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이 목련차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옛날 중국의 어느 왕조 시대에 지독한 비염에 시달리던 선비가 있었다 선비는 과거 시험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그의 질병은 공부하는 데에 심각한 방해가 되었다 번번이 낙방한 그는 마지막으로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 길에서 만난 누군가 선비에게 목련꽃으로 만든 차를 마시면 나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선비는 목련차를 구해서 마셨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비염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는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 나는 목련차의 효능 보다도 그 선비의 이야기가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이지만, 목련차는 그토록 오랜 역사를 가진 차였다 때로 희망이 끝나가는 곳에서 그렇게 새로운 길이 시작된다고 아픈 목으로 침을 삼키는 초겨...

자작시: 만약에(If...)

    만약에(If...) 내일은 비 소식이 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추위가 몰려 온다고 해서 미리 겨울 외투를 꺼내 놓았다 그런데 내게는 이렇게 겨울만 되면 생각나는 신문 기사가 있다 그해 겨울은 무척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독 주택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한파가 밀어닥친 어느 날 밤, 전기장판에 난 화재로 생을 달리했다 할머니의 집에는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할머니는 보일러를 전혀 틀지 않았다 보일러에 기름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보일러에는 석유가 가득 채워져 있었고, 미리 사다 둔 석유도 두 드럼통이나 되었다 할머니의 아들이 그렇게 다 준비해 둔 것이었다 하지만 비싼 기름값을 생각한 할머니는 오로지 전기장판만을 의지했다 돈에 눈이 먼 싸구려 전기장판 제조업자는 온도 조절기의 중요한 부품을 빼버렸다 전기장판의 과열을 막아주는 그 부품이 없으니 전기장판은 쉽게 불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따뜻한 겨울을 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득그득 보일러에 기름을 채워놓았으나, 결국은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해야만 했다 아끼며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할머니는 평생을 근검절약하며 살았을 것이다 기름보일러를 돌리는 일은 할머니에게 손이 덜덜덜 떨리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채워준 기름을 쓰느니, 전기장판으로 어떻게든 잘 견디자, 그렇게 생각했을까? 만약에 할머니가 보일러를 틀었더라면, 아들이 가슴 아프게 탄식하는 일이 없었을까? 물론 이 사건의 주요한 원인이 파렴치한 전기장판 제조업자에 있다는 건 분명하다 If로 시작되는 영어의 가정법(假定法)은 대부분 실현 불가능한 일에 대한 서술일 뿐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부터 미래의 일까지도 If의 가정법 문장에서는 원망과 한탄, 터무니없는 기대가 감지된다 그 할머니의 죽음에 그 어떤 If를 써본다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무 아끼며 살지는 말아야지, 나는 올해 처음으로 설치한 보일러의 난방 설정 온도를 18도로 맞추어 놓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

자작시: 견마지로(犬馬之勞)

    견마지로(犬馬之勞) 사극을 보다 보면 가끔 듣게 되는 대사가 있다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 같은 것 개와 말의 하찮은 노력, 이란 뜻의 이 사자성어는 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자신의 온 힘을 다해 보필하겠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말을 하는 이의 신분은 대개가 미천한 편에 속한다 나의 기억으로는 배웠다는 선비나 좀 거들먹거리는 부자가 이런 대사를 사극에서 주워섬기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다 권력에 빌붙으려는 잔챙이 같은 무리, 그들은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바짝 바닥에 대고는 힘있는 자를 향해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러면 그 말을 들은 윗사람은 삐딱하게 내려다 보며 경멸의 웃음을 줄줄 흘리곤 했다 그런 사람을 위해 있는 힘껏 견마지로를 보태던 이들의 말로는 좋지 못했다 권력자는 그들을 진짜로 짐승처럼 생각했으므로 마구 부려먹고는 곧 내버렸다 개와 말의 팔자가 그러했다 개는 기운이 쇠하면 복날에 두들겨 패서 잡아먹었고 말은 온갖 일을 하다 쓰러져 죽으면 그것도 도살하여 먹었다 조선 시대에 말고기는 구하기 어려운 별미로 여겨졌다 진짜 평생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배우지 못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출세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 뿐인 한 남자가 위정자에게 그렇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견마지로를 다하였으나, 처절한 굴종(屈從)과 헌신의 대가(代價)는 예약된 철창 뒤의 기나긴 시간이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