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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류스케와 떠나는 체호프식 치유 여행, 드라이브 마이 카(Drive My Car, 2021)

 

*아직 '드라이브 마이 카'를 관람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 최대한 스포일러를 넣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글의 전개상 어쩔 수 없이 들어간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불편한 독자들은 나중에 영화를 본 후에 이 글을 읽기 바랍니다. 


1. 영화를 보기 전에

  누군가 영화 사이트 게시판에 이런 질문글을 올린 것을 읽었다.

  "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려고 하는데, '바냐 아저씨'를 읽고 가야 하나요?"

  영화를 본 사람으로서 내 대답은 이렇다. '네, 그래요.' 3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 동안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대사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그러니 그 희곡을 모르면 이 영화를 온전히 감상해낼 재간이 없다. 그럼 인터넷으로 줄거리 요약이나 독서 유튜버가 축약 설명하는 동영상을 보는 것으로 괜찮을까? 안타깝게도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만나려는 관객은 영화를 보기 전에 안톤 체호프와 마주해야만 한다. 과연 하마구치 류스케는 관객에게 강제로 독서하게 만드는 감독일까?

  "나는 그저 '바냐 아저씨'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하마구치 류스케, filmcomment.com과의 인터뷰 가운데)."

  하마구치 류스케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제작이 결정되고 나서 한 일이 그것이었다. 그러니 관객은 체호프를 읽는 것 외에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2013년에 문예춘추에 아주 짧은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ドライブ・マイ・カー)'를 발표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 단편을 토대로 자신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갔다. 소설이 대강의 뼈대를 제공했다면, 체호프는 거기에 덧붙여진 건축 자재들이다. 그것을 조화롭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축조해낸 하마구치 류스케는 영화라는 틀 안에 문학을 녹여낸 하이브리드 장인인 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과 함께 언급해야할 또 다른 희곡은 영화 초반부에 주인공 카후쿠가 출연하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이 희곡은 오지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의 이야기를 통해 부조리한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연극 사랑은 영화 '아사코(Asako I & II, 2018)'에서도 드러난다. 헨릭 입센의 희곡 '들오리(The Wild Duck)'와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Three Sisters)'는 그 영화를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가 된다. 거기에 고초 시게오(牛腸茂雄)의 사진집 'Self and Others'도 추가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감독은 연극을 사랑하며, 특히 체호프의 광팬임이 분명하다. 

  '해피 아워(Happy Hour, 2015)'의 5시간 17분을 견딘 관객이라면, '드라이브 마이 카'의 3시간은 가볍게 느껴질 것이다. '해피 아워'로 알 수 있듯, 하마구치 류스케는 압축과 생략의 방식을 통해 영화를 간결하게 만들기 보다는, 하나의 이야기가 결말에 이르는 여정을 자세하게 풀어서 보여주고 싶어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러닝타임 3시간의 주요한 부분은 주인공 카후쿠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리허설 과정이 차지하고 있다. 일본어와 한국어를 비롯해 표준 중국어(Mandarin), 한국 수화(手話)가 섞인 다국적 언어의 연극은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각자 다른 언어로 말하는 배우들이 공연하는 '바냐 아저씨'를 통해 하마구치 류스케는 언어의 형식을 뛰어넘은 '감정의 소통'과 '상처의 치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2. 상실의 시간으로서의 중년, 그리고 치유의 여정

  서로 다른 삶의 배경과 이야기를 지닌 두 명의 등장인물이 있다. 주인공 카후쿠와 미사키가 그들이다. 그들이 만나기 이전의 카후쿠의 이야기를 하마구치 류스케는 프롤로그(prologue)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오프닝 크레딧은 바로 그 40분 정도의 프롤로그가 끝날 무렵에 뜬다. 연극 배우이며 연출가인 카후쿠는 글을 쓰는 아내 오토와 단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카후쿠는 연극 대본을 아내의 낭독으로 녹음한 테이프를 자신의 차에 늘 틀어놓고 연습한다. 어느 날, 해외 출장을 가려고 공항에 도착한 카후쿠는 날씨가 좋지 않아 비행기 예약이 미뤄졌다는 통보를 받는다. 어쩔 수 없이 집에 돌아온 그는 아내가 낯선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집을 나온 카후쿠는 그 일에 대해 이후로도 일체 내색을 하지 않고 지낸다. 그러다 그는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을 겪는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서막에 해당한다.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흐른 후, 카후쿠는 히로시마 연극제의 초빙 연출가로 다국적 언어로 공연되는 '바냐 아저씨'를 맡는다. 공연에 출연할 배우들은 오디션으로 뽑는데, 그 오디션에서 카후쿠는 아내의 내연남이었던 젊은 배우 타카츠키와 마주한다. 그는 아내의 장례식에서 타카츠키를 본 기억을 떠올린다. 주연인 바냐 아저씨를 카후쿠가 할 것이라는 주위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그 배역을 타카츠키에게 준다. 타카츠키는 극에서 47세인 바냐 역할을 젊은 자신이 떠맡은 것을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연극에 참여한다. 그렇게 카후쿠와 타카츠키의 뜻밖의 인연이 이어진다.

  한편, 연극제에서는 초빙 예술가의 안전을 위해 카후쿠에게 전담 운전기사를 붙여준다. '미사키'라는 이름의 골초이며, 과묵한 젊은 여성 운전자는 그렇게 카후쿠의 오래된 수동 클래식 자동차를 몰게 된다. 차 안에서 틀어놓는 '바냐 아저씨' 대본 테이프를 매개로 두 사람은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히로시마에서 새롭게 만나게 된 미사키와 타카츠키를 통해 카후쿠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데...

  관객은 영화의 초반부에서 주인공 카후쿠가 겪고 있는 상실을 바라보게 된다.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병원에 가게 된 카후쿠는 녹내장을 진단받는다. 약물로 시기를 늦출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시력의 손상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 아내와 함께 죽은 딸의 기일을 절에서 보내는 장면에서는 그가 오래전에 자식을 잃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그는 아내의 부정(不貞)을 알게 된 것에 뒤이어 죽음을 목격한다. 카후쿠가 연기하는 연극 속의 '바냐 아저씨'는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중년이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고통스러워 한다. 젊음도, 사랑도 이미 지나가 버렸다. 원래는 누이의 것이었지만, 누이의 죽음으로 매형 소유가 된 영지와 저택을 근근이 꾸려오는 동안 그의 시간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사라졌다. 그는 한탄한다.


  "난 마흔 일곱이야. 아마 예순 살까지 살겠지. 13년이나 남았어. 내겐 영원과도 같아. 어떻게 그 13년을 견디지? 내가 어떻게?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냔 말이지..."

(I am forty-seven years old. I may live to sixty; I still have thirteen years before me; an eternity! How shall I be able to endure life for thirteen years? What shall I do? How can I fill them?)

  체호프의 그 희곡 대사를 외울 때, 카후쿠는 바냐 아저씨가 아니라 그 자신이 된다. 또한 그는 공연 도중에 '바냐 아저씨' 1막의 대사, '그 여자의 정조란 가식이며 부자연스러운 것(such fidelity is false and unnatural)'이라고 말할 때에 북받히는 감정으로 대사를 더 잇지 못하고 무대에서 퇴장한다. 자신이 목격한 아내의 불륜이 그에게 수치스런 상처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점차로 카후쿠에게 '바냐 아저씨'는 연기해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공연해야하는 무거운 숙제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초빙한 연극제 주최 측의 바람과는 달리 바냐 아저씨 배역을 포기한다. 대신에 그것을 아내의 내연남이었던 타카츠키에게 넘긴다.

  무엇보다 카후쿠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아내의 죽음과 관련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스런 죄책감이다. 그는 갑작스런 뇌출혈로 세상을 뜬 아내의 죽음을 자신이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상처는 운전 기사 미사키가 들려주는 상실의 트라우마와도 기이하게 겹친다. 산사태로 엄마를 잃고 자신은 살아남은 미사키는 과거의 재난이 드리운 깊고 무거운 그림자 속에서 살고 있다. 미사키 또한 엄마의 죽음에 대한 마음의 빚을 털어내지 못한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워진다.

  카후쿠와 미사키가 나누는 감정의 색깔은 사랑일까? 가까워진 남녀의 사이를 '연인'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편협한 시각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친구, 또는 어떤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그 관계를 통해 두 사람은 자기 앞의 생을 담담히 응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하여 카후쿠와 미사키는 각자의 삶에서 치유의 여정을 시작한다.

  카후쿠는 갑작스런 타카츠키의 하차로 연극이 취소될 위기에 처하자 바냐 아저씨 역을 마지못해 떠맡는다. 마침내 연극이 상연된다. 무대 정면의 스크린에 다국적 언어의 자막이 뜨는 가운데 카후쿠는 청각 장애인 배우 윤아가 맡은 소피아와 함께 극의 마지막 장면에 이른다. 영화 속에서 수화로 표현되는 소피아의 대사는 잔잔한 감동을 준다.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만 해요. 그래요. 우린 살아야 해요. 우리 앞에는 길고 긴 밤과 낮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는 운명이 우리에게 떠안긴 짐을 견뎌야 하죠. 쉼없이 누군가를 위해 일해야만 할 거에요. 그렇게 우린 늙어갈 거에요. 마침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왔을 때, 비로소 무덤 너머의 것과 겸손하게 마주하게 될 테지요. 우리는 지난 삶을 돌아보며, 충분히 고통스러웠고 눈물을 흘렸으며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말할 거에요. 그리고 신은 그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겠지요. 아, 바냐 삼촌, 우리는 결국 아름답게 빛나는 삶을 만나요. 우리의 슬픔이 있던 이 자리를 기쁨으로 돌아보면서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쉬게 되겠지요. 바냐 삼촌, 난 그런 열렬한 소망을 갖고 있답니다."

(What can we do? We must live our lives. [A pause] Yes, we shall live, Uncle Vanya. We shall live through the long procession of days before us, and through the long evenings; we shall patiently bear the trials that fate imposes on us; we shall work for others without rest, both now and when we are old; and when our last hour comes we shall meet it humbly, and there, beyond the grave, we shall say that we have suffered and wept, that our life was bitter, and God will have pity on us. Ah, then dear, dear Uncle, we shall see that bright and beautiful life; we shall rejoice and look back upon our sorrow here; a tender smile—and—we shall rest. I have faith, Uncle, fervent, passionate faith.)


3. 비어있음의 미학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카후쿠가 다국적 언어로 연출하는 연극 '바냐 아저씨'이다. 서로 다른 국적의 연기자들, 거기에 청각 장애인 배우까지 그들은 각자의 언어로 대사를 소화한다. 오디션 장면에서 타카츠키가 아스트로프를, 대만 여배우 재니스가 엘레나를 맡아 극의 한 장면을 연기한다. 관객은 어떻게 상대방의 언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연기를 해낼 수 있을까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이 이루어진다. 몸짓과 감정 표현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배우들 사이에서 바로 그대로 전달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언어를 넘어선 그런 교감의 연기는 야외에서 이루어진 재니스와 윤아의 연습 장면에서도 재연된다. 재니스는 중국어로, 윤아는 수화로 연기하는 그 장면은 '바냐 아저씨'에서 의붓 엄마 엘레나와 전처 소생의 딸 소피아가 나누는 대화이다. 엘레나는 소피아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오해와 불편한 감정을 풀기 위해 노력한다. 두 사람은 마침내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데, 그 연기 장면에서의 따뜻함이 관객들에게도 전해진다.

  자신의 영화 시나리오를 대부분 직접 쓰는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터뷰에서 늘 '대사'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다. 어떻게 하면 대사가 배우들에게서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는지, 배우들이 그 대사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중점을 두고 다듬는 작업을 한다고 밝혔다. 그에게는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배우 개인이 가진 특성 사이의 간극을 메꾸는 것이 연출의 주요한 작업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하마구치 류스케는 배우에게 자신이 요구하는 연기를 하도록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가 가진 역량에서 최대한의 것을 끌어내기 위해 협의와 공감을 바탕으로 작업한다. 이것은 그의 영화 경력 초창기 때 생긴 어려움에서 습득된 것이다. 연기력이 부족한 배우와 영화를 찍게 되었을 때 감독으로서 어떻게 할 것인가가 그의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배우에게 연기를 위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 이런 하마구치 류스케의 연출 방식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카후쿠가 타카츠키에게 설파하는 연기론과도 맞닿아 있다. 타카츠키는 언어가 다른 배우들이 함께 연기를 하는 것에 회의를 내비친다. 앞서 언급한 재니스와 윤아의 야외 연기 장면도 그런 타카츠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카후쿠는 타카츠키가 가진 자아의 경직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텍스트에 적힌 대사 그 자체에만 의미를 한정짓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일러준다.

  "텍스트에 여백을 주게. 그래서 그것이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말이지."

  감독이 자신이 생각한 연출 의도를 배우에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배우에게 자기 표현의 자리를 주는 것. 그리고 희곡 대본의 활자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거기에 여백을 허용하는 것. 그 두 가지 경우 모두 '비어있음의 미학'과 연결된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속 인물들에서 드러나는 '자연스러움'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관객들은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이 영화나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 현실의 일상 어딘가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나에게 그것이 가장 생생하게 다가온 캐릭터는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 2021)의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였다.

  텍스트에 여백을 허용하지 못하는 경직성, 자신이 우선으로 하는 신념과 가치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을 허용하지 못하는 편협함. 결국 타카츠키의 닫힌 캐릭터는 스스로에게 파국을 가져온다. 여백을 허용하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리를 '내어주는' 의지적 행위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서도 적용된다. 인생의 구멍과도 같은 상처와 상실을 억지로 메꾸려고 하는 대신, 그곳으로 시간과 아픔이 흘러가도록 바라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영화의 마지막, 한국에서 지내는 미사키의 모습이 비춰진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가는 미사키의 차는 카후쿠의 것이다. 그리고 그 차에는 귀여운 레트리버 한 마리가 함께 한다. 청각 장애인 배우 윤아의 집에 미사키가 카후쿠와 초대받았을 때, 미사키의 마음에 들었던 레트리버가 이제 옆에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미사키는 이제 자신의 차가 된 카후쿠의 차를 운전하면서 평온한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 장면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카후쿠에게 히로시마에서의 연극 '바냐 아저씨'와 미사키와의 만남이 치유의 시작점인 것처럼, 카후쿠와 그의 연극을 통해 미사키도 같은 여정에 들어선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꽤 괜찮은, 참으로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감독이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이정표 같은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 2021)'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2021-2-bad-luck-banging-or-loony.html

영화 '아사코(Asako I & II, 2018)'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0/asako-i-ii-2018.html

영화 '해피 아워(Happy Hour, 2015)' 리뷰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1/11/chilly-scenes-of-winter1979-happy.html


*글 속에 인용한 희곡 대사 부분은 직접 번역했다.
   
**사진 출처: tiff.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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