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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뒤에 자리한 가슴 뻐근한 슬픔, 열대어(熱帶魚, Tropical Fish, 1995)

    *이 글에는 영화 '열대어'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학생 류즈창에게 학교는 수용소 같다. 수용소장 같은 무서운 여자 담임은 툭하면 몽둥이 체벌로 아이들을 훈육하며, 공부 못하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입버릇처럼 강조한다. 학업에 뜻이 없는 류즈창은 친구와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틈나면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류즈창과 친한 동네 꼬마 다오난이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우연히 마주친 다오난의 납치범들에게 류즈창도 잡히는 신세가 된다. 납치를 주도한 보스가 사고로 죽자, 부하 칭자이는 궁리 끝에 아이들을 자신의 고향 어촌 마을로 데려간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칭자이의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인간적으로 친해진다. 납치 사건이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가운데, 궁핍한 살림의 칭자이의 가족들은 류즈창의 몸값을 받아내 인생역전의 기회를 노린다. 과연 이 어리버리한 일가족 납치단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열대어(熱帶魚)'는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첸유순(陳玉勳) 감독의 1995년도 작품이다. 주로 상업용 광고 작업을 많이 했던 감독의 재치있고 기발한 감각은 영화 속 여러 장면에서 돋보인다. 류즈창이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상상 속 바다에서 잠수정을 타고 구해내는 장면이라든지, 칭자이 일가족의 우스꽝스러운 협박 전화를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그렇다. 기본적으로 코미디의 정서를 밑바닥에 깔고 있음에도, 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류즈창은 고교 입학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그 시험은 마치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관문처럼 여겨진다. 방송에서는 납치된 류즈창의 안위 보다도, 류즈창이 시험을 볼 수 있을 것인가를 비중있게 다룬다. 그의 아버지와 시장 후보는 방송 인터뷰에서 납치범에게 류즈창을 풀어줄 것을 호소하는데, 그 이유가 시험을 치루지 못해 '인생을 망치는' 불행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학 입학 ...

어느 베트남 입양 여성의 과거로의 여행, Daughter from Danang(2002)

    1975년, 미국의 베트남 철군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에 'Babylift'란 명칭의 작전이 수행된다. 그 작전을 통해 미국으로 온 베트남 고아들은 입양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이디(Heidi Bub)도 그렇게 미국으로 온 베트남 아이였다. 미국 남부, 신실한 종교심을 가진 싱글 여성의 아이로 입양된 하이디에게 성장의 과정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억압적이고 냉담한 양모는 하이디에게 베트남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도록 가르쳤고, 하이디는 부모의 사랑이란 것을 느끼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양모와의 갈등은 급기야 하이디가 대학생이 되면서 완전한 결별로 이어진다. 결혼을 하고 두 딸의 엄마가 된 하이디는 베트남의 친모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하이디의 친모도 딸을 찾으려고 노력하던 중에 베트남계 미국 언론인 트란의 도움으로 모녀의 상봉이 이루어진다. 게일 돌진과 빈센테 프랑코의 2002년작 다큐멘터리 '다낭에서 온 딸(Daughter from Danang)'은 불행하게 헤어진 모녀의 상봉 속에 가려진 베트남 전쟁의 깊은 상처를 조명한다.   첫 인터뷰 장면에서 관객들은 하이디의 외모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베트남 인과 백인 혼혈인 하이디의 외모는 이 여성에게 드리운 미국 현대사의 그림자를 짐작케 한다. 유색 인종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이 있는 남부에서 성장한 하이디의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실제로 KKK단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보며 자란 하이디에게 남부는 독선적인 양모와 함께 견뎌야할 삶의 토대였다. 양모와의 단절 이후, 하이디는 무조건적이고 따뜻한 애정에 대한 갈망을 상상 속의 친모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진 다낭에서의 상봉, 하이디는 친모 마이와 의붓 아버지, 이부(異父) 형제들을 만난다. 이 만남을 통해 비로소 관객들은 이 가족의 복잡하고 지난한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감독 게일 돌진과 빈센테 프랑코는 이 베트남 모녀...

라두 주드의 통찰력 있는 역사극, Aferim!(Bravo!, 2015)

    영화는 숲 속을 헤치며 말을 타고 가는 두 명의 여행자를 비춰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때는 1835년, 루마니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왈라키아 왕조가 시대적 배경이다. 대영주(Boyar로 지칭함)의 법 집행관인 코스탄딘은 영주의 명을 받고 도망 노예 집시 카르핀을 찾는 중이다. 그의 동행은 아들 이오니타. 앳된 티가 역력한 십대의 아들은 군복과 총검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하는 행동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도망자를 쫓는 여정은 경험많고 노련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일러주는 직업과 세상살이에 대한 교육의 시간이 된다. 가는 길에 만나는 사제, 집시, 농민, 관료들과의 만남은 당시의 루마니아 사회를 알 수 있는 역사화처럼 묘사된다. 루마니아의 감독 라두 주드(Radu Jude)의 2015년작 'Aferim!'은 관객들을 19세기의 루마니아로 안내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부분은 '집시(Roma)'와 관련되어 있다. 코스탄딘은 가는 도중에 만나는 집시 무리를 매우 가혹하게 다룬다. 그들은 말 그대로 짐승과 같은, 어쩌면 짐승 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진다. 코스탄딘은 채찍을 휘두르며 집시들을 제압하며, 그들이 채굴한 사금도 갈취한다. '사금 채취'는 집시들이 전통적으로 종사한 일이었다. 루마니아의 귀족 계급과 수도원은 그런 집시들을 노예로 두면서 그들의 노동력과 생산물을 수탈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집시란 벌레처럼 더럽고 하찮은 존재라고 가르친다. 그가 집시처럼 경멸하고 역겨워하는 또 다른 대상은 사제와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길에서 만난 사제는 '유대인'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배척의 감정을 토로한다. 코스탄딘과 사제가 공유하는 그런 차별적 인식은 유럽 사회가 가진 반유태주의의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부자(父子)가 도망 노예를 추적하는 여정의 대부분은 숲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19세기 루마니아인의 정신 세계를 반...

부주의하고 나른한 청춘의 얼굴들, Last Summer(1969)

    아주 오래전에 EBS '세계의 명화'에서 'The Swimmer(1968)'를 방영한 적이 있다. 버트 랭카스터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독특하고 기이한 작품으로 내 기억에 남았다. 아주 가끔씩,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버트 랭카스터가 수영복 차림으로 비를 맞으며 야외 수영장을 배회하는 장면이었다. 그 시절 헐리우드에서 저런 영화도 만들 수 있다니 참 놀랍네,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은 프랭크 페리(Frank Perry)였다. 'Last Summer'는 그가 이반 헌터(Evan Hunter)의 소설을 원작으로 1969년에 만든 영화이다. 1968년, 미국 영화에 새로운 등급 시스템이 도입된다. 'MPA(Motion Picture Association) film rating system'은 기존의 검열 제도인 'Hays Code'를 대체했다. 'Last Summer'는 새롭게 만들어진 등급 시스템에서 'X 등급(Rated X; 16세 미만 관람 불가)'을 받았는데, 이는 TV 방영은 물론 일반 상영에서도 상당한 제약을 받는 등급이었다. 영화가 어떤 장면을 포함하고 있길래 그런 판정을 받았을까? 십대들의 방종하고 타락한 여름을 그린 이 영화는 오랫동안 과소평가되고 잊혀져 있었다.   영화는 부유한 이들의 여름 별장지인 Fire Island의 해변가를 배경으로 한다. 샌디(바바라 허쉬 분)는 해변에서 낚시 바늘에 목을 다친 갈매기를 발견한다. 마침 지나가던 피터(리처드 토마스 분)와 댄(브루스 데이비슨 분)이 샌디의 갈매기 치료를 돕는다. 피터와 댄은 매력적인 샌디의 호감을 사려고 애를 쓰고, 샌디는 그들을 조종하며 군림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어느 날, 해변가에서 샌디가 갈매기를 끈으로 묶어 애완 동물처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본 로다(캐서린 번즈 분)는 샌디를 비난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가슴 찡한 성장의 여정, 이사(お引越し, Moving, 1993)

  *이 글에는 영화 '이사(お引越し)'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삼각형의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세 명의 가족들을 비춰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초록색의 이 독특한 모양의 식탁 가운데에는 13살 딸 렌코, 엄마와 아빠가 자리하고 있다. 뭔가 심드렁해 보이는 부부는 서로 엇나가는 대화를 이어가고, 딸은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려고 애를 쓴다. 가족은 이사를 앞두고 있다. 드디어 이사한 새로운 집에서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쌓아가길 기다리는 렌코에게 엄마는 아빠가 주고 간 이혼 서류를 보여준다. 그렇게 다정한 아빠가 이제 더이상 집에 오지 않는다니, 렌코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 엄마 아빠가 따로 살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렌코는 어떻게 해서든 아빠의 마음을 되돌려 예전처럼 같이 살고 싶다. 그러나 어른들의 세계는 렌코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비와 호수로의 가족 여행을 몰래 계획한 렌코, 렌코의 부모는 다시 합칠 수 있을까?   소마이 신지(相米慎二) 감독의 1993년작 '이사(お引越し, Moving)'는 부모의 결별을 마주한 소녀의 성장담을 그린다. 영화는 히코 타나카(ひこ・田中)가 1990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 속 렌코를 연기한 타바타 토모코는 8200명이 넘는 오디션 지원자들을 제치고 발탁되었다. 요정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게이샤로 가업을 이을 운명이었던 소녀는 그렇게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영화는 타바타 토모코의 연기에 큰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신인인 어린 소녀의 연기 지도가 소마이 신지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닛카츠(日活) 영화사의 조감독 시절에 신인 여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소마이 신지는 타바타 토모코를 렌코로 자연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부모의 별거는 렌코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렌코가 보여주는 모습은 마치 죽음을 앞둔 인간이 보여주는 5단계의 심리적 ...

장 피에르 멜빌의 독특한 전쟁 영화, 바다의 침묵(Le Silence de la mer, The Silence of the Sea, 1949)

    미워해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일은 쉽다.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 조카딸과 함께 사는 시골 노신사는 자신의 집을 독일군 장교의 숙소로 징발당한다. 뜻하지 않게 적과 동거하게 된 노인과 조카는 독일군 중위 베르너에게 한결같은 침묵으로 대한다. 그들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베르너는 매일 저녁, 노인과 조카가 있는 거실 벽난로에서 대화가 아닌 독백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노인과 조카의 단단한 침묵에 어느새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워하는 점령군 장교가 매우 예의바른 사람이며, 예술적인 소양을 지닌 교양인임을 알게 된다. 비록 말로 이루어지는 그 어떤 대화도 없지만, 그들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교류가 생겨난다.   장 피에르 멜빌(Jean-Pierre Melville)의 데뷔작 '바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Sea, 1949)'은 1942년에 출간된 작가 베르코스(Vercors)의 동명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멜빌은 자신이 첫 장편으로 반전 문학 작품을 선택했다. 이 짧은 소설에는 그 어떤 거친 폭력이나 살상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노인과 조카의 내면 묘사와 독일군 장교의 혼잣말이 잔잔하게 펼쳐질 뿐이다. 멜빌은 소설의 그 단조로움과 고요함을 오로지 영상과 소리에 의지해서 풀어나간다. 영화의 서사 대부분이 노인의 집 거실 벽난로를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실제 작가의 집에서 이루어진 촬영은 그 비좁은 거실 공간을 다채롭게 제시하고 활용한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교의 발소리, 그가 거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벽난로의 장작을 뒤적거리는 소리, 등장 인물들의 손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영화의 느슨한 서사를 메꾼다. 오히려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용된 영화 음악이 귀에 거슬리게 들린다.   작곡을 전공했다는 베르너는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자신의 열렬한 애정을 고백한...

가족 소동극에 숨겨진 소련의 사회 문제, 사랑과 비둘기(Любовь и голуби, Love and Pigeons, 1984)

    영화 '사랑과 비둘기(Love and Pigeons, 1984)'는 감독 블라디미르 멘쇼프(Vladimir Menshov)가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1980)'로 대중적인 성공을 얻은 뒤에 찍은 작품이다. 블라디미르 구르킨의 희곡을 각색한 이 영화 또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개봉 당시 4450만명의 관객이 영화를 보았으며, 이 영화를 아직도 기억하고 다시 보는 러시아 관객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길래 그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을까? 의외로 영화의 줄거리는 지극히 평범하다.   강이 흐르는 시골 마을에서 목재 노동자로 일하는 바실리는 비둘기 사육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아내 몰래 생활비를 빼내어 비둘기를 사들이는 그에게 아내 나쟈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차분한 성격의 큰딸 류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은 아들 레오니드, 아버지를 이해하는 속 깊은 막내 올리야는 부부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웃에는 알콜 의존증이 심한 삼촌 미챠와 그런 남편 때문에 속끓이는 숙모 슈라가 산다. 별 다를 게 없는 소소한 그들의 일상에 어느 날 일이 생긴다. 바실리는 일하다 얻는 부상 때문에 휴양지에서 쉴 수 있는 휴가를 받는데, 그곳에서 만난 라이사와 눈이 맞는다. 비둘기와 가족 밖에 모르던 바실리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라이사의 집에 머무른다. 바실리의 아내 나쟈는 상심해서 드러눕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행동에 상처받는다. 부유한 라이사의 생활 방식에 맞추지 못하던 바실리는 가족이 그리워진다. 다시 집에 돌아온 바실리. 과연 아내와 자식들은 그를 받아줄까?   바람난 남편의 귀환을 둘러싼 가족 소동극은 겉보기엔 아주 흔하고 진부한 이야기 같다.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나쟈는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비탄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걸 연기하는 배우 니나 도로시나(Nina Doroshina)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나쟈의 상황이 너무나 심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