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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24의 게시물 표시

자작시: 첨삭(添削)

    첨삭(添削)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등지고 날면 더 잘 날아갈 수 있다고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내게는 없었다 어깃장을 놓으며 악다구니를 쓰며 욕을 퍼붓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백날 해봐야 안 되는걸 바람의 첨삭(添削) 선생을 진작에 찾아갈 걸 바람의 독에 말라버린 황무지의 공항 마지막 남은 관제사는 도망가 버렸다 다시 한번 시동을 걸어본다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 바람의 결을 읽어라 바람과 함께 노래해라 바람을 첨삭할 수 있다고 믿는 바보들과 작별하라

자작시: 7월 31일

  7월 31일 장마는 끝났다 참외는 끝물이다 옥수수는 조금 더 먹을 수 있다 아침 6시 반 아파트 경비는 기다란 삼각 괭이로 놀이터의 흙을 고른다 쿡쿡 탁탁  굳은 흙을 헤집었다가 다시 평평하게 만드는 일 아무 의미도 없는 일 매일 똑같은 하루 살아온 여름보다 살아갈 여름날은 이제 적게 남았다 열대야로 설친 잠이 푹 꺼진 낡은 소파로 꾸벅꾸벅 쏟아져 내린다

자작시: 불가사리(Starfish)

    불가사리 죽어가는 산호초에서 불가사리가 번성하고 있다더군 과학자들은 불가사리를 사냥하고 있어 불가사리는 그저 죽어가는 산호의 몸뚱이를 먹고 살기 위해 뜯어먹을 뿐인데 그걸 죽이다니 그 불쌍한 불가사리를 내 머릿속에 풀어두자 너의 푸르스름한 눈웃음과 희디흰 손과 단정한 입술을 천천히 뜯어먹을 수 있게 붉은 촉수가 잘라버린 불온한 손가락 하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그리움      

자작시: 열대어(熱帶魚)

  열대어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폭염특보가 발효 중입니다 라디오는 기계음의 목소리를 미적지근한 온수로 흘려보낸다 휘적휘적 더운 물길을 헤치며 집안을 천천히 걷는다 이 바다는 참으로 따뜻하다 작은 열대어 한마리 스르륵 갈라진 아가미에는 커다란 낚시 바늘이 눈물처럼 꿰어져 있다 나는 눈물을 똑똑 떼어서 버린다 너는 눈물을 뚝뚝 흘린다 너의 바다는 참으로 먼 곳에 있으며 어쩌면 나는 그곳에 닿지 못할 것이다 그 바다를 떠올리는 일은 끝없이 가여워 손바닥만큼 열려 있는 부엌의 창문 자그맣게 웃는 소리를 내며 스르륵 열대어가 가버린 자리 내 손바닥에는 바늘 모양의 문신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자작시: 미지(未知)의 시

미지(未知)의 시 에어컨이 없는 작은 방 목에다 젖은 수건을 두르고 시를 쓴다 슬픈 시 좀 어디 알려줘 봐요 시란 원래 슬픈 거야 사는 게 즐거우면 시를 쓸 수 없어 어느 머저리의 시학을 떠올린다 나는 방바닥을 천천히 긁으며 미지의 시를 탐구한다 멸종된 공룡의 뼈가 만져진다 시커먼 세월의 때가 낀 지층 속 화려한 깃털은 보이지 않는다 너는 한때 크게 울었고 땅이 울리도록 달렸으며 사랑스러운 새끼들을 품었었지 하지만 이제 한낱 뼛조각으로 이렇게 언젠가 내가 죽어서 누울 관을 생각한다 나의 뼈와 나의 시들이 우는 소리를 아주 아주 먼 훗날의 누가 듣겠는가 15년 된 낡은 컴퓨터는 밭은 숨을 내뱉는다 목덜미의 젖은 수건은 반쯤 말라버렸다 땀에 절은 탱크톱에서는 어설픈 쉰내가 난다 미지의 뼈를 가만히 만져보다가 나는 서둘러 묻어버렸다 로그아웃하시겠습니까? Yes!

자작시: 코끼리(The Elephant)

  코끼리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말들뿐이다 나는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심사평을 읽는다 언어라는 것은 얼마나 우습고 복잡한가 지금 막 써넣은 '장님'이란 단어가 자기검열에 걸린다 요즘 세상에 '장님'이란 말을 써도 되는지 잠깐, 생각해 본다 아니, 심사평에 대한 시를 쓰려는데 초장부터 '장님'이란 단어에서 걸려 넘어진다 자, 그럼 '장님' 대신에 '시각장애인'을 쓰면 어떨까 이건 좀 뭔가 밋밋한 느낌이 난다 어쩔 수 없다 그냥 '장님'으로 밀고 나가자 언어를 단련하는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응모작들이 많았다, 고 어느 심사위원은 한탄했다 언어를 단련하라고? 언어가 칼이니? 불에다 달구어서 두들기고 단련하게? 결국은 당신들 입맛에 맞는 거, 그런 거 뽑은 거겠지 그러니까, 당신들이 휘두르는 권력의 언어를 탐하라는 거지 코끼리를 읽는다 코끼리를 만진다 코끼리 다리를 살짝 꼬집어 본다 싸구려 커피 한 잔에도 감사하며 이렇게 코끼리를 써본다  

자작시: 불면증(Insomnia)

  불면증 언니, 나 요새 잠을 잘 못 자 잠을 자다 깨다 그래 잠을 못 자니까 몸도 피곤하고 기억력도 엉망이야 주말에 집에서 반찬을 만드는데, 반찬 만들어 놓고 뚜껑을 닫는다며 접시를 덮어놓았지 뭐야 회사에서도 회의하다가 졸기도 하고 뭐랄까, 정신이 멍해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작년에 정리해고로 사람들 많이 내보냈잖아 이제 정년(停年)까지 일하는 건 불가능해 나이든 사람은 알아서 나가줘야 하는 분위기지 나도 언제 나가라는 말 들을지 몰라 눈칫밥 먹는 뒷방 늙은이 같은 기분 얼마 전에는 꿈을 꿨어 엄마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건너편 건물이 보였어 거긴 너무나도 칙칙한 회색의 건물이었는데 엄마와 내가 거기에 가야만 하는 거야 건물 안에 들어가니까 계단이 다 허물어지고 물이 뚝뚝 새는 그런 곳이었어 엄마는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뿌리치려 하고 언니, 졸음이 쏟아져 이렇게 자도 한두 시간 있다 깨겠지만 그래도 자둬야지 내일 일해야 하니까      

자작시: 전단지(傳單紙)를 돌리는 남자

  전단지(傳單紙)를 돌리는 남자 이상한 날이다 오늘은 아파트에서 전단지 돌리는 남자를 두 명이나 보았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매우 가볍고 조용하며 습기와 열기가 절묘한 배합을 이루는 장마철에 그들은 모두 긴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아파트에 전단지를 다 붙이려면 120번 스카치테이프를 잘라야 한다 초짜는 3센티, 프로는 0.5센티면 충분하다 오늘 내 집에 전단지를 붙인 이들은 0.7센티의 스카치테이프로 마감했다 그들은 프로다 그들이 붙여놓은 전단지는 새로 분양하는 대기업 건설사의 아파트 내가 가질 수 없는 꿈의 집 검은 웃음이 똑바로 떨어진다 발등에 박힌 전단지는 피를 흘리며 그렇게 쓸쓸하게 죽어갔다    

자작시: 수압(水壓)

  수압(水壓) 아파트의 수도관 공사가 끝나고 수압이 전보다 세졌다 부엌 수도꼭지는 콸콸 샤워기에서는 팡팡 세탁기는 쏴아쏴아 양변기는 쒸익쒸익 귀에서는 삐이삐이 머리는 지잉지잉  족저근막염에 걸린 나의 오른발은 쓸데없이 칭얼거리는 못난 계집애 수도관에는 그 계집애가 살고 있어서 물을 틀 때마다 우는 소리를 낸다 시끄러워! 조용히 하란 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보였다 아버지, 말 좀 하세요 화장실로 들어간 아버지는 나오지 않았다 하수구에서 차오르는 물과 함께 어디론가 미친 수압과 싸워야지 더러운 늙음을 견뎌야지  

자작시: 세발자전거(Tricycle)

  세발자전거 날아가 버린 인생의 물기 말하자면 젊은 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일 난 자전거를 탈 줄 몰라 그러므로 달리는 자전거에서 바라보는 풍경 따위는 상상할 수가 없어 머리 허연 늙은 여자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가더군 신나게 달릴 수는 없겠지 좀 느리게 가면 어때 무릎이 깨져서 흉터가 생기진 않을 거야 모험을 하기에는 좀 많이 늦었어 그래도 출발은 할 수 있어 지익직, 아스팔트를 긁으며

자작시: 한밤의 케이블 TV(Cable TV at midnight)

  한밤의 케이블 TV 새벽 2시 반, 잠이 오질 않아서 케이블 TV를 틀었다 내가 좋아하는 동물 다큐멘터리를 틀어주는 데가 있나 열심히 리모컨을 눌러본다 하지만 그런 채널은 없다 성우는 기깔나는 목소리로 열심히 싸구려 물건을 선전한다 저런 걸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군 그 성우는 다음 채널에서 또 다른 물건을 팔고 있다 젊은 남자 가수는 쥐어짜내는 목소리로 트로트를 부른다 귀엽게 보이려는 손짓은 어색한 웃음을 터지게 만든다 자동차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나온다 열심히 배우고 졸업해서 빨리 돈을 벌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 돈 벌어야지 쓸데없이 대학 가서 뭐하니 어떤 할머니는 엉덩이뼈가 부러져서 응급실에 누워있다 보기만 해도 심란해서 얼른 채널을 돌린다 요새 새로 방영되는 미니 시리즈가 나온다 젊은 배우들의 얼굴은 죄다 낯설다 내가 모르는 애들 오래전 구닥다리 사극도 나온다 구질구질한 화질 속 중견 배우들은 이제 은퇴해서 시골에 집을 짓고 산다 그러니까, 벌써 20년 전에 만들어진 사극이구먼 어떤 채널에서는 나를 가르쳤던 교수가 한국 영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저 양반은 별로 늙질 않았구나 나는 미친듯이 흰머리가 나는데 그 많은 채널 가운데 어쩜 그리 볼 게 없을까 TV를 끄고 창문으로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본다 불 꺼진 거실에 경광등처럼 번득이는 TV 화면 저 사람은 늘 새벽 4시까지 저렇게 시간을 보낸다 늙은 사람이겠지 내일 돈 벌러 나갈 젊은이는 자고 있다 정신 나간 매미가 짧게 우는 소리를 낸다 얘야, 지금은 잘 시간이야

자작시: 큰 개(The big dog)

  큰 개 큰 개가 짖고 작은 개가 짖는다 큰 개는 작은 개가 싫은 모양이다 작은 개는 큰 개가 우습다 앙칼지게 짖는다 네가 뭔데 큰 개는 작은 개가 무서워서 짖는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다 작은 개의 주인은 매일 오후 5시 큰 개가 사는 집 앞을 지나간다 그렇게 작은 개와 큰 개가 만난다 괴롭고도 짜증나는 개들의 인사 큰 개의 주인은 어디론가 늘 나가 있다 큰 개는 지나가는 사람만 보면 짖는다 놀라고 무섭고 외로워서 큰 개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는 우는 표정으로 드러누워 있다 이 더운 여름, 길고 누런 털은 눅눅해진 나머지 푸르스름하게 곰팡이가 핀 것 같다 털갈이는 어찌 하는지 후두둑, 장맛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빗소리에도 놀라 짖는 큰 개 나는 큰 개가 몹시도 가엽다    

자작시: 장마(The rainy season)

  장마(The rainy season) 튼살처럼 터져버린 물소 가죽 소파에 몸을 누이고 낮잠을 청한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아버지가 거실에 앉아계셨다 회색의 얼굴, 아무 말도 없이 죽은 조상이 꿈에 보이는 건 어쨌든 좋은 건 아니에요 젊은 아가씨 무당이 말했다   엄마는 혼자 집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 무너진 기억의 제방(堤防)을 더듬으며 여기가 어딜까?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아 나는 땀과 장맛비로 범벅이 된 엄마의 얼굴을 가만히 닦아 주었다

자작시: 땀띠(Heat rash)

  땀띠 여름이면 도지는 병 따끔거리고 가렵지만 죽을병은 아니지 며칠 전 꿈에서 너를 보았지 보고 싶은 마음이란 땀띠 같은 것 서늘한 바람이 불면 사라지는 결국은 그런 것 그래도 가려워 미칠 것 같아 피가 나도록 긁어대지만 까짓것 칼라민(calamine) 좀 바르지 치덕치덕 두껍게 닳아져 버린 분홍의 감정 가루가 후두둑 떨어져 이번 생에는 안 되겠지 다음 생이란 없어 이전 생에 우리가 만났었던가 오돌토돌한 불그죽죽한 흉터 가만히 긁으며 가을을 기다려

자작시: 삼계탕(蔘鷄湯, Ginseng chicken soup)

  삼계탕(蔘鷄湯) 냉동 삼계탕을 주문했다 봉지째 데워서 먹을 수 있는 간편식 얼어버린 국물에 찹쌀밥 한 줌 내 주먹 크기의 작은 닭 한 마리 저 정도의 닭은 양계장에서 얼마나 키운 후에 도살되는 것일까 2주 정도? 아니면 20일? 배급기가 쏟아내는 사료를 꾸역꾸역 먹은 닭이 비좁은 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다 그렇게 나에게로 왔다 십자가 모양으로 다리가 꺾인 닭은 참회하는 죄수가 되어 누워있다 타자(他者)의 살과 뼈를 취해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육식의 딜레마 고기맛에 중독된 사람들의 머릿속, 공장 닭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상상하는 능력은 거세되었다 인공육(人工肉)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므로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죄책감을 삼키고 뚝배기의 어린 닭 다리를 편하게 풀어주었다 가스레인지의 파란 불꽃이 타닥타닥 경쾌한 소리를 낸다    

자작시: 매트리스(The mattress)

  매트리스 버려진 매트리스는 장맛비에 퉁퉁 불었다 빗물로 배가 불룩해진 매트리스 +7000, 폐기물 수거업자는 급하게 휘갈겨 쓴 숫자를 남겼다 이 매트리스를 수거하려면 7천 원이 더 필요하다는 뜻 매트리스의 주인은 일주일째 모른 척하고 있다 사람들의 뜨악한 눈길을 받으며 저렇게 자신의 몸뚱이를 드러내는 일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냐 나는 매트리스를 보며 기이한 연민을 느낀다 흉물스럽고 외롭고 괴로운 매트리스 매트리스는 재활용이 거의 불가능한 제품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어딘가에는 버려진 매트리스의 거대한 무덤이 있을 것이다 뒤틀린 몸뚱이들이 엉키고 싸우며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그런 곳일지도 몰라 합성섬유와 솜덩어리는 갈가리 찢길 것이며 스프링은 튕겨지며 용광로에 갈 수도 있겠지 그 누구도 매트리스의 최후를 상상하지 않는다 매트리스의 고통을 헤아리지도 않는다 불어터진 매트리스의 허리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물 이제, 사랑은 더러운 추억이 되어버렸으며 죽음은 빨리 치워버려야 하는 물건으로 남았다  

자작시: 다시마

  다시마 엄마의 집 찬장에서 다시마를 발견했다 몇 년을 묵은 것 같은, 아주 잘 마른 다시마 나는 다시마를 물에 불린다 푸른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후쿠시마 원전이 터지기 전의 그 바다 불린 다시마에다 집간장과 식초, 소금, 그리고 매실 원액과 청주를 넣는다 정해진 비율 따위는 없다 레시피 같은 것을 무시하므로 내 요리는 변화무쌍하며 늘 새로움이 있다, 고 생각한다 엄마의 다시마는 원래 국물을 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 나의 냉장고에서 다시마 절임으로 변모하는 중이다 구부러진 다시마의 여정 엄마는 이 다시마를 언제 사놓았는지 알지 못한다 오늘은 나의 할머니, 그러니까 엄마에게는 시어머니가 되는 우리 할머니가 불쌍하다고 눈물을 지었다 그런데 엄마는 할머니와 늘 불화했다 어디에 계시는 거니? 얼마나 외로우실까? 엄마, 할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어 엄마의 머릿속에서는 뺄셈이, 그리고 나서는 덧셈, 곱셈과 나눗셈이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무너져 내리는 기억의 방주(方舟) 나는 방주에 난 커다란 구멍에 내 주먹을 넣어본다 어떤 기억의 물은 흙색이고 어떤 기억의 물은 청색이다 흙색의 물은 지루하며 청색의 물은 가엾다 요새는 왜 그렇게 흰색 차들이 많으냐? 모두들 흰색의 세계로 도망치고 싶은 것이겠죠 나는 같은 대답을 매일 엄마에게 들려준다 다시마의 세계는 갈색이고 눈물이며 그래서 짠맛이 난다 엄마의 잃어버린 바다와 다시마가 끈적거리는 시간을 천천히 걸어간다   

자작시: 다래끼

  다래끼 무지근한 통증은 너와 함께 온다 나는 네가 절대로 그립지 않다 너 없이도 잘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부드러운 눈길을 기억한다 아주 약한 안약에서부터 센 안약까지 차례대로 넣어본다 나는 너를 막아야 한다 나은 것 같다가 다시 아프고 가렵다 나는 조금씩 끈기를 잃어가고 있다 너는 물기를 머금은 염화칼슘처럼 끈덕지게 내 눈가를 파고들며 묻는다 이길 수 있니? 곪아서 터지게 내버려둘 자신이 없으므로 열심히 눈을 닦아주며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대로 그렇게 잠들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우리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자작시: 유영(游泳)

  유영(游泳) 지렁이는 신나게 헤엄을 치고 있다 장맛비가 마련해준 아스팔트 웅덩이 그들의 행복한 비명은 사방으로 퍼져 나는 조심스럽게 유영(游泳)의 우주를 건너간다 비록 누군가의 부주의한 걸음걸이와 차의 뒷바퀴에 으스러질 휘발성의 행복일지라도

자작시: 표절(剽竊)

  표절(剽竊) 남의 나라 작가 소설 베껴서 문학상도 타고 문학상 심사위원도 하고 교수 노릇도 한다 끼리끼리 짬짜미 붉어진 얼굴 더 붉어질 것도 없으니 악독(惡毒)한 시대를 견디려면 영악(獰惡)해야 하는데 우직한 글은 악덕(惡德)이 되어 버려 비릿하게 썩은 내가 나더라도 향내 나는 표절(剽竊)의 종이로 잘 포장해서 먹고사는 것들 아,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가 다 아는 걸 눈을 찡끗, 부끄러움을 모르면 그렇게 괴물이 된다

자작시: 요양원

  요양원 엄마가 요양원에 들어간 지 한 달이 되었네요 다행히 엄마가 잘 적응해서 지내세요 그런데 한가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요 엄마를 만나러 가면 엄마한테서 냄새가 나요 거기서는 목욕을 일주일에 한 번만 시켜준대요 이 더운 여름에 일주일에 고작 한 번이라니, 다른 곳도 그런가요? 네, 보통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고 들었어요 두 여자는 그렇게 말을 주고받았다 우연히 그 이야기를 듣던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엄마는 여름만 되면 땀을 됫박으로 흘린다 요양원에 가고 싶어하는 노인은 아무도 없다

자작시: 못난이 참외

  못난이 참외 쇼핑몰에서 못난이 참외를 주문했다 정말로 못난이 참외가 집으로 왔다 너무 작고 너무 익은 참으로 못난 참외들이 잔뜩 장사꾼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내다 팔지도 못할 찌끄러기 참외를 파는 것 그걸 사는 사람에게도 이유가 있다 진짜로 못난이를 보내줄까? 좋은 거 몇 개는 보내주겠지 하지만 매우 정직한 장사꾼은 참말로 못난이 참외를 한가득 보내준다 내일이면 익어 문드러질 그런 못난이들을 다 인생의 경험이다, 그렇게 생각해요 못난이 참외가 물크러지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자작시: 광인(狂人)

  광인(狂人) 그는 40대 후반의 남자로 보였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해장술을 들이켰다 오전 10시, 빛바랜 퍼런색 슬리퍼를 질질 끌고 집 근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시킨다 시를 써야 할 시간 이 찌끄러기 같은 것들아 너희들이 인생을 알아? 그러면서 무슨 시를 쓴다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시 자비 출판(自費出版)으로 4권의 시집을 냈지만 아무도 그를 시인으로 불러주지 않았다 나는 그가 쓴 시를 찬찬히 읽다가 금세 지겨워져서 그만두었다 그는 재능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어중간한 재능 후미진 이발소에 걸린 유화(油畫)같은 시 장맛비가 예고된 흐린 뒷골목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에는 소주 세 병과 마른오징어 한 마리 싸구려 월세방의 침대에 앉아서 경건하게 시상( 詩 想 )을 다듬는다 꿀꺽, 시는 그렇게 그의 인생을 삼켰다  

자작시: 여름, 옥수수

  여름, 옥수수 아주 맛있는 옥수수야 이게 찰옥수수 맞지? 난 어렸을 적부터 옥수수를 좋아했지 정말 맛있구나 할머니는 텃밭 가득 옥수수를 심으셨어 내가 옥수수를 좋아했으니까 아, 그런데 할머니도 돌아가셨을까 돌아가셨겠지, 그래, 돌아가셨을 거야 하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이제 기억들은 검은 물에 쓸려가지만 여름, 옥수수가 빼곡히 심어진 텃밭이 식탁에 주단처럼 깔리고 엄마의 건너편에는 작은 체구의 새하얀 할머니가 앉아있다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어, 난 할머니가 보고 싶구나, 많이

자작시: 벌레들

  벌레들 옥수수 껍질을 벗기다가 하얗고 통통한 벌레를 보았다 아주 빠른 판단 손가락으로 꾹 눌렀을 때 물크러진 벌레의 살점 한 점의 미안함이 있다 너도 먹고 살려고 거기에 있었을 뿐인데 어스름 저녁 낡은 방충망을 뚫고 검은 모기 한 마리 부엌을 질주한다 다음 날 오후, 나는 하얀 커튼 사이 모기의 다리를 잽싸게 잡아챘다 죽어 마땅할 벌레 죽여야만 하는 벌레 죽일 수밖에 없는 벌레 죽이는 마음을 흔드는 벌레 죽이고 나서 한참은 생각나는 벌레  

자작시: 대머리 신사(紳士)

  대머리 신사 그때 당신 마음을 받아줄 걸 그랬어 그깟 대머리가 뭐라고 내가 젊었을 적엔 당신이 대머리인 게 좀 마음에 걸리더군 당신 마음은 참 비단결이었는데 나한테 퇴짜 맞고 당신이 좀 상처를 받았더랬지 몇 년 후에 당신 사진을 보니까 글쎄, 가발을 쓰고 있더라 꼭 나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야, 그렇지? 근데, 그 가발은 당신한테 안 어울려 긴 시간이 흘렀지 어제 꿈에서 정말 오랜만에 당신이 보이더군 풍성해진 머리는 여전히 어색해 이제는 가발 대신에 머리를 심었나봐 난 여전히 당신은 대머리였을 때가 낫다고 생각해 당신, 괜찮은 사람 만나서 잘살고 있겠지? 머리카락 따위 사람의 외모는 피부 한꺼풀일 뿐인데 그깟 대머리가 뭐라고 난 당신의 보드라운 마음을 놓쳐버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