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8월, 2022의 게시물 표시

나루세 미키오 영화의 전성기를 열다, 밥(めし, Repast, 1951)

    "밥 아직 안된 거야?" 신문에 고개를 파묻은 남자는 아내를 향해 무심한 표정으로 묻는다. 여자의 속마음이 독백으로 흘러나온다. '매일 밥을 짓고, 미소된장국을 끓여서 낸다. 365일이 항상 똑같은 일상이다.' 하츠노스케(우에하라 켄 분)와 미치요(하라 세츠코 분) 부부는 권태기에 들어섰다. 집에서 남편의 관심사는 '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는 하루의 대부분을 식사 준비와 집안일로 동동거리면서 보낸다. 꼬리가 뭉툭한 길고양이 '유리'를 보살피는 것이 미치요의 유일한 낙이다. 아내 미치요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단지 남편의 무관심뿐만이 아니다. 증권 중개인으로 일하는 남편의 월급은 미치요를 돈에 쪼들리게 만든다.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는 일도 익숙하다. 건너편 집에는 술집 마담이 살고 있고, 좀도둑들이 출몰해서 살림살이를 훔쳐가기도 한다. 미치요는 지루한 결혼 생활과 하층민으로 전락해가는 자신의 삶에 염증을 느낀다.   나루세 미키오의 1951년작 영화 '밥(Meshi, Repast)' 은 하야시 후미코(林 芙美子) 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작가는 영화가 개봉된 그 해에 세상을 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후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을 여러 편 영화로 만들었다. 여성과 하층민의 가난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이 작가의 소설은 나루세 미키오를 만나 깊이있는 울림을 낸다. 영화 '밥'의 주인공 미치요는 목까지 차오르는 불만과 권태에 질식 직전이다. 그 때, 도쿄에서 남편의 조카 사토코가 온다. 사토코는 결혼을 재촉하는 고루한 아버지에게서 이제 막 도망나온 참이다. 그런데 이 철딱서니 없는 아가씨는 미치요의 인내력을 시험한다. 집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남편에게 너무 스스럼없이 행동한다. 군식구가 하나 느니까 쌀독도 금새 바닥이 난다. 남편이란 작자는 아내의 고민 따위는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멋진 새 구두를 사고, 조...

The Rehearsal(HBO TV series Season 1, 2022) 4편 The Fielder Method

*이 글은 다큐 시리즈 'The Rehearsal'의 세부 항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짜 연기와 진짜 현실의 사이에서   오리건의 집에서 안젤라와의 양육 리허설이 진행되는 동안, 네이선은 LA에 자신의 연기 강좌를 개설한다. 리허설 프로그램에 출연할 배우들을 채용하기 위해서였다. 네이선이 창안한 이른바 '필더 메소드' 는 이러하다. 모방하려는 대상(primary)이 있고, 수강생은 그 대상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며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킨다. 수강생들은 정육점, 주스 전문점, 카센터, 건물 안내 요원과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현실 연기를 습득한다. '그건 스토킹(stalking)같은 건가요?' 처음에 수강생들은 네이선의 낯선 연기 방식에 당황하지만, 수업을 거듭할수록 '필더 메소드'의 핵심에 다가선다.    네이선은 자신이 직접 필더 메소드를 시연한다. 수업에서 무언가 불편해 보이는 수강생 '토마스'의 삶을 단편적으로나마 재현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것을 위해 네이선은 토마스로 분장하고, 자신과 수강생들의 대역을 뽑아 연기 강좌 리허설을 진행한다. 그러니까 이 에피소드에서 네이선의 진짜 현실 강의 와, 네이선이 토마스가 되어 참여하는 수업 리허설 이 병치된다. 네이선이 토마스를 선택한 이유는 아주 간명하다. 네이선은 토마스의 모호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토마스가 필더 메소드 수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정작 수강생 토마스의 입장이 되고보니, 연기 수업의 모든 것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부담스러운 방송국 촬영팀의 카메라, 복잡한 양식의 촬영 동의서, 도대체 무얼 해야할지 모르는 이상한 연기 수업... 네이선의 '토마스 되어보기'는 수업을 리허설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토마스를 하숙집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토마스의 방에서 지낸다. 마치 인공 지능 컴퓨터가 데이터를 수집하듯 네이선은 토마스가 입는 옷, 먹는 음식,...

EIDF 2022 리뷰 3: 두 개의 별(After the Rain, 2021)

  대지진 그 이후,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두 개의 별(After the Rain, 2021) 판 지엔(Fan Jian), 104분   그날은 비가 내렸다. 아이는 학교에 가기 싫다며 떼를 썼다. 할머니는 그런 아이를 달래어 억지로 학교에 보냈다. 그런데 그날, 천지를 뒤흔드는 엄청난 대지진이 발생했다. 학교 건물은 무너져 내렸고, 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네 언니가 죽은 그날, 나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란다." 할머니는 Ranran에게 그렇게 말한다. 란란은 죽은 손녀딸의 여동생이다. 중국 정부의 엄격한 한 자녀 정책 때문에 Ying과 Ping부부는 둘째딸 란란을 시골로 보냈다. 언니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에 란란은 다시 부모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란란은 자신의 존재가 언니의 대체품으로 여겨지는 것 같아 괴롭다.   Sheng과 Mei 부부도 대지진으로 딸을 잃었다. 중국 정부는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시험관 아기 시술(IVF)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부부는 시술로 아기를 갖는 것은 실패했으나 곧 자연 임신으로 아이를 얻었다. 아들이었다. 태어날 아기가 딸이기를 열망했던 부부는 크게 실망한다. 아빠인 Sheng의 좌절감은 아들 Chuan에 대한 미움으로 이어진다. Mei 또한 아들에게 마음을 붙이기가 쉽지 않다. 추안은 어릴 적부터 자신이 죽은 누나 덕분에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자란다. 이 가정에는 냉기와 무관심이 일상처럼 자리잡는다.     판 지엔은 '두 개의 별(After the Rain, 2021)' 에서 2008년 쓰촨성 대지진으로 어린 자식을 잃은 두 가족의 삶을 따라간다. 무려 10년이란 시간 동안 그의 카메라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재해의 트라우마를 기록한다. 죽은 자식에 대한 애도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옅어지지 않는다. Sheng은 딸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몸부림친다. 그는 마음의 고통을 술로 달랜다. 아들에게 냉랭하기 짝이 ...

EIDF 2022 상영작 리뷰 2: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Singing in the Wilderness, 2021)

  그늘진 미래 속에 자리한 희망의 한 조각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Singing in the Wilderness, 2021) 천둥난(Chen Dongnan), 98분   '작은 우물 마을'이라고 불리는 먀오족(苗族) 마을에는 교회와 성가대가 있다. 이 외진 곳의 소수 민족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신을 찬미하고픈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한 성가대의 노래는 지역 공산당 간부 장씨의 눈에 띈다. 그는 먀오족 성가대 홍보에 발벗고 나선다. 대부분 농사일에 종사하는 성가대원들은 TV 경연 프로그램에 나가면서 갑작스런 주목을 받는다. TV 출연도 하고, 합창 대회에서 나가서 상도 받는다. 과연 성가대원들은 그러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Chen Dongnan의 다큐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는 외견상으로는 먀오족 성가대의 이야기를 담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오늘날 중국에서 벌어지는 소수 민족의 암울한 현실이 조심스럽게 포개어져 있다.   바깥 세상을 접하기 시작하면서 성가대원들은 물질의 가치에 경도되기 시작한다. 신기하고 멋진 도시의 풍광, 다채로운 상품들은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는 먀오족의 마음을 흔든다. 평상시에는 농부의 삶을 사는 성가대원들은 노래가 '돈'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경연 대회에서 우승한 상금은 성가대원들의 손에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매니저를 자처하는 당 간부 장씨는 성가대를 자기 치적 쌓는 도구로만 여길 뿐이다.     다큐는 특히 두 명의 성가대원의 개인사를 찬찬히 풀어놓는다. 신실한 신자인 Sheng은 성가대가 외부 활동을 하면서 세속의 노래들을 부르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에게 노래란 신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다. 성가대의 상업적 변질은 Sheng에게 좌절감을 안겨준다. 돈을 주는 행사 때에만 성가대에 나오는 이들이 늘어난다. 그렇게 성가대가 세속에 물드는 동안 Sheng은 동네 아가씨와 결혼...

The Rehearsal(HBO TV series Season 1, 2022) 1, 2, 3편 리뷰

  1편 Orange Juice, No Pulp 2편 Scion 3편 Gold Digger *이 글은 다큐 시리즈 'The Rehearsal' 의 세부 항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네이선 필더의 리허설 세계 입문: 1편 Orange Juice, No Pulp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그의 최종 학위는 학사이다. 무려 12년 동안 동료들에게 거짓말을 해온 이 남자 스키트는 어느날 문득 거짓말의 무게를 느낀다. 그래, 진실을 이야기하자. 그렇게 결심을 했지만 말을 꺼내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자신과 가장 가까운 동료 트리샤가 보여줄 반응이 가장 걱정된다. 이때 그의 어려움을 조금 덜어주겠다는 사람이 등장한다. Nathan Fielder 는 스키트가 트리샤와 대면할 순간을 위해 완벽한 리허설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한다. 네이선은 스키트가 진실을 말할 장소인 동네 주점을 똑같이 세트로 만든다. 트리샤 역을 맡은 대역 배우도 뽑았다. 배우는 트리샤뿐만이 아니다. 주점의 바텐더를 비롯해 직원, 손님들도 모두 배우이다. 진짜 스키트는 가짜 건물, 가짜 손님들 사이에서 자신의 진실 고백 리허설을 시작한다.   올해 7월에 HBO 채널을 통해 방영된 다큐 시리즈 'The Rehearsal' 이 미국에서 화제다. 이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의뢰자들에게 고민 해결을 위한 리허설 기회를 제공한다. 단지 상황극이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리허설 과정을 총괄하는 네이선 필더는 발생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고려하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애쓴다. 1편 'Orange Juice, No Pulp' 에서 뜻밖의 변수는 스키트가 선택한 주점에서의 퀴즈 타임이었다. 스키트는 자신이 늘상 푸는 퀴즈의 정답을 맞추지 못하면 신경이 곤두설 것 같다고 네이선에게 말한다. 그것이 스키트의 진실 고백에 영향을 줄까 우려한 네이선은 미리 진짜 주점 관계자를 만나 퀴즈 문제를 건넨...

EIDF 2022 상영작 리뷰 1: 시간의 조란학(2021), 다크 레드 포레스트(2021)

  시간의 조란학(O, Collecting Eggs Despite the Times, 2021) 핌 즈비어르(Pim Zwier), 84분 다크 레드 포레스트(Dark Red Forest, 2021) 진화칭(Jin Huaqing), 85분 1. 새알 연구자의 복원된 삶: 시간의 조란학(2021)   조란학(oology) 는 조류학에서 뻗어나온 학문이다. 새의 알과 둥지, 번식의 생태적 환경이 연구 주제가 된다. 지금은 새알 채취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 학문의 존재 근거는 다소 희미해졌다. Max Schönwetter(1874–1961) 는 그 조란학의 개요서를 쓴 독일 학자이다. 다큐 '시간의 조란학' 은 쉔베터가 쓴 편지를 바탕으로 그의 생애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쉔베터가 지나온 나치 독일 시기와 전쟁의 기억도 포함된다. 당시 독일의 상황을 보여주는 다양한 아카이브 필름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한 연구자의 지난했던 삶에 대한 이해를 더한다.   나는 처음엔 이 다큐를 볼 생각이 별로 없었다. 시놉시스만 보았을 때에는 새알 연구자의 생애가 무어 그리 볼 게 있겠는가, 싶었다. 그런데 이 다큐는 놀라운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내레이션으로 나오는 쉔베터와 지인들의 편지글에는 학문 연구에 대한 열정이 넘쳐난다. 당시 새알을 연구하는 이들은 학자라기 보다는 수집가의 영역에 머물렀다. 쉔베터는 새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새알'이라는 분야로 확장시켰다. 비교적 부유했던 그는 자주 여행을 다니면서 새알을 수집했고 그것을 꼼꼼히 기록해서 관리했다. 그의 새알 컬렉션이 쌓이는 동안 바깥 세상은 점차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히틀러가 집권했고 독일은 전쟁의 광풍에 휩싸였다.   이 순수하고 열정적인 새알 연구자는 전장터에 가서도 새알을 모으러 다녔다. 독일이 핀란드를 침공했을 때, 쉔베터도 그곳에 있었다. 그가 쓴 편지글에서는 핀란드의 숲속에서 진귀한 새알을 구하게 된 기쁨이 드러난다. 아니, 세상이 미쳐돌아가는 ...

Juan Antonio Bardem의 두 편의 영화: 자전거 주자의 죽음(Muerte de un ciclista, 1955), 메인 스트리트(Calle Mayor, 1956)

  *이 글에는 두 영화의 결말 부분이 들어있습니다. 1. 좌절된 로맨스에 투영된 독재 정권의 현실: 자전거 주자의 죽음(Muerte de un ciclista, 1955)   영화를 목숨 걸고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페인의 영화 감독 Juan Antonio Bardem(1922-2002) 의 삶이 그러했다. 투쟁적 성향의 그는 독재자 프랑코가 지배하던 엄혹한 시절과 불화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영화가 혹독한 검열로 잘려나가서 누더기가 되는 꼴을 봐야했다. 심지어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감독은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려고 애를 썼다. 스페인에서 영화 만드는 일이 어렵게 되자 해외 합작 영화로 창작의 활로를 열었다. 검열의 마수를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불균일한 작품성의 영화들로 채워진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그 가운데에서 초기작에 해당하는 '자전거 주자의 죽음(Death of a Cyclist, 1955)' 과 '메인 스트리트(Main street, 1956)' 는 유독 반짝거린다.   '자전거 주자의 죽음'은 자동차 사고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는 연인과 짧은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사고를 낸다. 자전거 탄 사람을 친 것이다. 동승한 남자가 확인해 보니, 차에 치인 사람은 살아있는 상태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그냥 가자고 재촉한다. 그렇게 그들은 뺑소니를 친다. 여자가 그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인 마리아는 예전 연인 후안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 만약 사건이 알려지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다음날 신문 기사에는 자전거 탄 남자의 사망 소식이 실린다. 누군가 그 사고를 목격하지는 않았을까? 마리아와 후안의 마음 속에는 불안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영화는 예기치 않은 사고가 촉발한 긴장과 갈등을 그물처럼 촘촘히 짜내려간다. 마리아는 상류층 파티의 단골 손님인 라파로부터 협박을 받...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적 마침표,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Scattered Clouds, 1967)

  여자는 자신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행복한 순간에 서있다. 정부 관료인 남편은 미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함께 떠날 예정인 부부에게는 반가운 아기 소식도 있다. 그런데 그 여자 유미코의 행복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남편은 불운한 자동차 사고로 숨을 거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자는 아기도 잃는다. 남편을 죽게 만든 사고의 가해자는 평범한 회사원 미시마. 자동차의 타이어가 터지면서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고였다. 남자는 무죄를 선고받는다. 비록 법적인 책임은 면했지만, 남자는 속죄의 의미로 매달 일정한 금액을 미망인에게 송금한다. 어떻게 보면 철천지원수 사이의 남녀. 그들은 예기치 못한 사랑의 감정에 빠진다.   영화 '흐트러진 구름(乱れ雲, Scattered Clouds, 1967)' 은 나루세 미키오의 유작이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 해에 그가 만든 2편의 영화는 특이하게도 스릴러 영화였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 경력을 마무리하면서, 그가 가장 잘 하는 멜로 영화로 다시 돌아왔다. 영화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감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영화는 그의 대표작 '부운(浮雲, Floating Clouds, 1955)' 이었다.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하고 원했지만 여자는 결국 영락한 신세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뜬구름같은 사랑의 부질없음과 아픔을 그려낸 '부운'의 흔적은 '흐트러진 구름'에서도 감지된다.   '부운'의 남녀 주인공 토미오카와 유키코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장소는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밀림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국의 숲을 몽롱한 꿈속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곳에서 유부남인 남자는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여자는 불확실한 사랑의 미래에 자신을 던진다. '흐트러진 구름'에서도 그와 비슷한 장소가 나온다. 사별 후, 이런 저런 직업을 전전하며 경제적 어려움과 남자들의 추근거림에 시달린 유미코...

여자 안의 타인(女の中にいる他人, The Stranger Within a Woman, 1966), 어두워지기 전에(Juste avant la nuit, Just Before Nightfall, 1971)

  하나의 소설, 두 개의 다른 영화: 여자 안의 타인(女の中にいる他人, The Stranger Within a Woman, 1966), 나루세 미키오 어두워지기 전에(Juste avant la nuit, Just Before Nightfall, 1971), 클로드 샤브롤 원작 소설: Edward Atiyah, The Thin Line(1951)    1966년은 나루세 미키오에게 '스릴러의 해'였다. '여자 안의 타인(The Stranger Within a Woman, 1966)' 과 '뺑소니(Hit and Run, 1966)' 는 이전까지의 나루세 미키오와는 전혀 다른 영화적 궤적을 보여준다. '뺑소니'는 스릴러의 틀 안에서 여성의 삶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다. 이와는 달리 '여자 안의 타인'에서는 주인공이 남성이다. 치정 살인 사건에 연루된 남자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음울한 결말까지 더해져 영화는 무겁기 짝이 없다. 이 영화는 원작이 되는 소설이 있다. 레바논 출신의 작가 Edward Atiyah 의 'The Thin Line(1951)' 을 각색한 것으로, 이 소설을 가지고 Claude Chabrol 도 영화를 만들었다. '어두워지기 전에(Juste avant la nuit, 1971)' 가 그것이다. 전자책으로는 원작 소설이 나온 것이 없어서, 대신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를 보고 원작의 세부적 내용을 추측해 볼 수 밖에 없었다. 두 영화에는 서로 다른 감독의 스타일이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간극이 존재한다.   클로드 샤브롤은 남자 주인공 샤를이 불륜 관계에 있는 여자를 죽이게 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변태적 욕망에 휩싸인 남자는 실수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가 죽인 여자는 친구 프랑수아의 아내이다. 클로드 샤브롤과는 달리 나루세 미키오는 살인 장면을 나중에 플래시백으로 제시한다. '여자 안의 타인'의 도입부 쇼트...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를 찾아, The Loneliest Whale: The Search for 52(2021)

  *이 글에는 다큐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2-hertz whale' 이라는 별명이 붙은 고래가 있다. 고래는 종에 따라 특정 주파수 대역의 소리로 서로 소통한다. 대부분의 고래들이 내는 소리의 주파수 대역은 40헤르츠 이하인데, 그에 비해 52헤르츠 고래는 상당히 높은 소리를 내었다. 이 고래가 어느 종에 속하는지, 이동하는 경로는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진 1989년 이후로 52헤르츠 고래의 존재는 계속해서 감지되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자 Joshua Zeman은 이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그는 '52' 를 찾아나서기로 결심했다. 2021년작 다큐 'The Loneliest Whale: The Search for 52' 는 바로 그 52헤르츠 고래를 찾는 지난한 여정을 담고 있다.   다큐는 표면적으로는 '52'의 행방을 찾아나선 연구팀의 여정을 그리면서, 그와 함께 고래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훑어 나간다. 19세기에는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해 고래 사냥이 무자비하게 이루어졌다. 석유의 발견으로 더이상 고래를 사냥할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포경 산업은 번성했다. 고래 고기에 대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950년대 들어서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1966년에 해양 생물학자가 녹음한 고래의 소리는 음반으로 제작되어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사람들은 고래를 먹을거리가 아닌 함께 공존해야할 해양 생명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환경 운동과 함께 국제적인 NGO 단체 그린피스(Greenpeace)의 활동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래 무리가 자신들만의 소리로 서로 소통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고래 소리를 가장 전문적으로 연구한 곳은 미 해군이었다. 냉전시대에 소련 잠수함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다양한 정밀 탐사 장비가 사용되었다. 고래가 내는 노랫소리는 가장 많이 탐지...

아내로 살아간다는 것, 아내의 마음(妻の心, A Wife's Heart, 1956)

    남자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무언가를 결심한듯 마침내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키요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찻집에는 그들 말고 다른 손님은 없다. 그때, 주인이 카운터로 나온다. 주인을 보더니 그 남자 켄키치(미후네 토시로 분)는 다시 침묵을 지킨다. 무더운 여름날, 두 사람은 잠시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그곳에 들어왔다. 그들은 서로의 감정을 잘 알고 있지만, 이제까지 그것을 입 밖으로 내어본 적은 없었다. 곧 비가 그치고 그들은 찻집을 나선다. 영화 '아내의 마음(妻の心, A Wife's Heart, 1956)' 에서 인물들의 감정은 매우 절제되어 있다. 그 남자 켄키치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은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인물의 감정을 자연 현상과 결합시킨다. '야성의 여인(あらくれ, Untamed, 1957)' 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 욕망에 끌린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갈 때,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나루세 미키오는 그들 사이에 일어난 격한 감정의 떨림을 나뭇가지에 쌓인 두터운 눈이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것으로 대신한다.   키요코와 신지는 결혼한지 5년이 되었다. 부부는 작은 잡화상을 하고 있지만 가게는 잘 되지 않는다. 궁리 끝에 가게 옆의 공터에 음식점을 내기로 한다. 키요코의 시어머니는 괜한 일을 벌인다며 못마땅해 한다. 어떻게든 삶의 활로를 찾아보려는 부부. 키요코의 친구 유미코에게는 은행원 오빠 켄키치가 있다. 켄키치의 도움을 받아 대출을 받은 키요코는 가게를 낼 꿈에 부푼다. 그즈음, 키요코의 큰동서가 어린 딸을 데리고 온다. 곧이어 실직한 시아주버니까지 집에 들어앉는다. 시아주버니는 자신도 가게를 내겠다며 키요코에게 대출을 받아달라고 부탁한다. 시어머니와 큰동서는 은근히 키요코를 압박한다. 키요코는 곤란한 지경에 처했는데, 남편이란 작자는 게이샤와 온천 여행을 갔다온다. 아내는 열불이 난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9/11: Inside the President's War Room(2021)

  그날, 대통령의 시간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다. 그날 저녁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대국민 담화를 준비한다. 중계 방송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대통령은 책상 위를 세차게 내려친다. 파리 한마리를 잽싸게 죽인 그는 미소를 지으며 얼른 평정심을 되찾는다. 이 장면은 백주 대낮에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테러 사건만큼이나 비현실적이고 기이하게 비춰진다. 이날 TV 화면에 비친 대통령은 확신에 차있으며 미국민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9월 11일 당일 대통령 부시의 행적은 그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Adam Wishart의 다큐 '9/11: Inside the President's War Room(2021)' 은 바로 그날,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을 복기한다. 부시 대통령 본인을 비롯해 당시 부통령 체니, 국가 안보 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보좌진들의 생생한 증언, 사진과 영상 자료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건 발생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9/11 테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인터넷으로도 충분히 검색 가능하다. 이 다큐는 이제까지 알려진 9/11의 세부적인 항목에 무언가를 더하는 대신에, 대통령 부시의 관점에서 그날의 일을 재구성한다. 9월 11일 새벽, 대통령은 여느 때처럼 새벽 조깅을 했다. 오전에는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참관하는 행사가 기획되어 있었다. 참관 수업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보좌진은 믿기지 않은 테러 소식을 접한다. 어떻게든 대통령에게 알려야만 했다. 수업중 귀엣말로 보고받은 대통령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마디로 그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대통령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소식을 접한 보좌진들도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한가지였다. 대통령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이어진 부시와 참모진들의 행적은 처절한 도피 같았다. 테러리...

나루세 미키오의 독특한 스릴러물, 뺑소니(ひき逃げ, Hit and Run, 1966)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무섭다. 영화 '뺑소니(ひき逃げ, 1966)' 의 주인공 쿠니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하나뿐인 어린 아들을 잃었다. 그 비극은 남편이 불운하게 세상을 뜬지 얼마되지 않아 일어났다. 쿠니코의 아들은 뺑소니 사고로 죽었다. 사고를 낸 사람은 부잣집 운전기사로 재판에서 약소한 벌금형을 받았다. 쿠니코는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다. 그런 쿠니코에게 사건을 목격한 동네 주민이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이 본 뺑소니 운전자는 줄무늬 스카프를 두른 '여자'였다는 것. 쿠니코는 경찰에 재수사를 요청하지만, 경찰은 이미 끝난 사건이라는 말만을 할 뿐이다. 쿠니코는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다.   이 영화에는 서로 다른 계층적 배경을 지닌 두 명의 엄마가 등장한다.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쿠니코는 전형적인 하층 계급의 여성이다.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쿠니코의 과거는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매춘부였던 쿠니코는 착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다. 그 결혼 생활은 불행했던 이 여자의 인생에서 선물처럼 주어진 행운이었다. 비록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쿠니코에게 아들은 삶의 버팀목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었다. 그것도 아주 억울하게. 자식잃은 어미의 가슴은 복수심에 불탄다.   쿠니코의 아들을 사고로 죽게 만든 키누코는 부잣집 사모님이다. 남편 카키누마는 자동차 회사의 중역으로 키누코와는 정략 결혼으로 맺어졌다. 애정없는 결혼 생활, 키누코는 바람을 피운다. 여자가 아이를 치고도 그대로 달아난 것은 동석한 애인의 존재를 들킬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남편의 운전기사가 죄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키누코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키누코의 삶. 하지만 키누코의 집에 가정부로 취직한 쿠니코는 곧 그 집안에 흐르는 냉기와 불행의 기운을 감지한다. '이상한(変な, 영어의 strange에...

사랑할 때와 죽을 때, 강변 호텔(Hotel by the River, 2018)

  *이 글에는 영화 '강변 호텔(2018)'의 결말이 들어있습니다.   시인 영환(기주봉 분)은 오랜만에 두 아들과 만난다. 그가 자식들을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영환은 죽음의 예감을 느끼고 있다. 밤에는 악몽에 시달린다. 그는 자식들에게 사진관에 가서 영정 사진까지 찍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시인은 지금 강변 호텔에 머물고 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난 호텔 주인이 시인의 팬이었다. 주인은 영환에게 아무 부담없이 호텔에 와서 지내라고 초대했다. 그 호텔에는 손을 다친 젊은 여자 아름(김민희 분)이 머물고 있다. 아름은 연인과 결별한 후유증에 시달리는듯 하다. 그런 아름을 위로하기 위해 아는 언니(송선미 분)가 찾아온다. 그저 평화로워 보이는 겨울 강변의 풍경, 시인의 불길한 예감은 괜한 것일까?   근래에 들어 홍상수의 영화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최근작인 '당신 얼굴 앞에서(2021)' 는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중년의 여배우가 등장한다. '강변 호텔(Hotel by the River, 2018)' 은 죽음의 예감에 사로잡힌 노시인이 주인공이다. 홍상수의 영화들도 감독 자신처럼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강이 보이는 호텔방에서 몸을 일으키는 영환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두 아들 경수와 병수를 만날 생각이다. 도착을 알리는 큰아들 경수의 전화, 영환은 객실로 올라오겠다며 방번호를 알려달라는 경수의 청을 완곡히 거절한다. 부모 자식간이지만 자신의 공간을 개방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의지가 보이는 장면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영환과 두 아들 사이의 정서적 거리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환은 사랑 때문에 젊어서 처자식을 내친 인물이다.   "미안한 것 때문에 인생을 같이 할 수는 없는 거야"   늙은 시인은 가족을 나 몰라라 했던 자신의 과거를 그렇게 옹호한다. 영환의 모습에서 홍상수 본인의 현실이 겹치는 것은 어쩔 ...

흘러가는 모든 것들, Clouds of Sils Maria(2014)

    "시그리드는 스무 살이라구요."   중년의 배우 마리아(줄리엣 비노쉬 분)는 자신을 스타덤에 오르게 만든 연극의 배역 시그리드를 잊을 수 없다. 시그리드는 상사 헬레나를 유혹해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치명적 매력을 지닌 배역이었다. 세월이 흘러서 마리아에게 그 연극의 출연 제의가 다시 들어온다. 그러나 '시그리드'가 아닌 '헬레나'다. 그 역을 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고 싫은 마리아는 자신의 에이전시 담당자에게 도저히 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는 시그리드 역을 맡을 수 없는 마리아의 현실을 일깨워 준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 는 나이든 여배우가 직면한 현실을 그려내면서 매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바로 '늙음'이다. 마리아는 시그리드 역을 이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명확히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왜 나이듦을 '쿨하게' 인정하고 아주 현실적이고 산뜻하게 삶을 살아가지 못하느냐고, 누군가는 영화 속 마리아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지금 매우 젊거나, 현자이거나, 아니면 바보이거나.     마리아가 헬레나 역을 맡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과거의 빛나는 기억에 집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과거에 상대역 '헬레나'를 맡았던 배우가 1년 후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도 영 찜찜하다. 마리아는 그 배역을 맡는다는 것은 자신이 늙었으며, 배우로서도 전성기를 지났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 거부하려고 하지만, 매니저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 분)은 헬레나 역이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며 그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아사야스는 마리아와 발렌틴이 그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대본 연습하는 과정을 아주 흥미있는 연출로 보여준다. 분명히 배우와 ...

이 여배우를 보라, Personal Shopper(2016)

    어제,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서 TV를 틀었는데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좀 있으니 화면 우측 상단에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란 설명과 함께 '퍼스널 쇼퍼'란 제목이 뜬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영화인가 궁금해서 보았다. 그래도 칸에서 상까지 주었을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나에게 매우 낯선 감독이다. 어떤 영화들을 만들었나 살펴보니, 필모그래피에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 2014) '가 뜬다. 아, 이 영화... 우연히 보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중간에 꺼버린 영화였다. 줄리엣 비노쉬의 나이든 모습도 내게는 정말로 충격이었더랬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블루(1993)' 의 비노쉬는 얼마나 빛났던가. 아무리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늙어가는 여배우의 얼굴을 보는 것은 때론 가슴 아프고 견디기 힘들다. 그 영화에서 나이든 비노쉬와 대비되는 젊은 여배우가 나왔었는데, 바로 크리스틴 스튜어트였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내게 유부남 감독하고 바람난 철없는 여배우로 각인되던 참이었다. 결국 헤어지기는 했지만, 저 여배우가 앞으로 어떻게 자신의 영화 경력을 이어나갈 것인가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다 어제 '퍼스널 쇼퍼(2016)' 에서 스튜어트를 다시 만났다. 이 영화에서 스튜어트는 퍼스널 쇼퍼 모린 역을 맡아서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망해버린 영화를 심폐소생시켜서 다시 되살릴 정도로 좋은 연기다. 영화는 솔직히 말해서 공허한 껍데기 같다.   모린은 쌍둥이 오빠 루이스를 얼마 전 잃고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상태에 있다. 영매 ( 靈 媒) 였던 루이스가 죽은 이후에도 자신의 곁을 떠돈다고 생각하는 모린은 루이스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다 루이스의 집에서 심령체(ectoplasm, 죽은 영혼에서 발산되는 유동성 물체)를 발견하고 공포에 질린다. 그것이 ...

Olivier Assayas가 만들어낸 매혹적인 영화의 미로: Les Vampires(1915-1916)에서 Irma Vep(1996)에 이르는 길

  1. 진정한 팬심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Irma Vep(1996)   예전에 배우 장만옥이 프랑스 감독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둘의 인연이 이어졌었는지 궁금하기는 했었다. 그들이 'Clean(2004)' 을 찍었을 때는 그리 길지 않았던 결혼 생활이 끝난 뒤였다. 영화 'Irma Vep(1996)' 는 배우 장만옥과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를 이어준 오작교 같은 작품이다. 이 영화를 만들고 2년 뒤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래서 그런지 'Irma Vep'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에 대한 감독의 팬심이 느껴진다. 그것도 아주 절절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정신없이 돌아가는 영화사 사무실. 홍콩 배우 매기 청(장만옥의 영어식 이름)은 이제 막 공항에서 오는 길이다. 매기는 르네 비달 감독의 영화 'Irma Vep' 출연이 예정되어 있다. 그런데 영화사 사람들은 이 배우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저마다 꼬여버린 일정, 일거리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내느라 바쁘다. 매기는 빡빡한 촬영 일정 속에서 외국인 스탭들과 작업해야만 한다. 거기에다 매기가 맡은 Irma Vep역은 매기에게도 너무 낯설고 이상하다. 몸에 꽉 끼는 검정 라텍스 의상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감독은 어디가 아픈지 기운이 없어 보인다. 촬영 스탭들 사이에 쌓인 갈등은 고성이 오가는 싸움으로 번진다. 과연 매기는 이 괴상한 프랑스 영화를 무사히 찍을 수 있을까?   매기가 찍기로 한 영화는 무성 영화 시절의 Louis Feuillade 가 내놓은 'Les Vampires(1915-1916)' 를 원작으로 한다. 그 무성 영화의 여주인공 이름이 바로 Irma Vep . 르네 감독은 자신이 매혹된 무성 영화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고 싶어한다. 매기는 그의 꿈을 실현시켜줄 동방의 뮤즈인 셈이다. 하지만 촬영은 엉키기만 하고 급기야 르...